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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총학생회장 故 박관현 열사의 마지막 연설

민주화 운동가에서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동생 박관우 인터뷰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7/05/15 [13:31]

전남대 총학생회장 故 박관현 열사의 마지막 연설

민주화 운동가에서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동생 박관우 인터뷰

서울의소리 | 입력 : 2017/05/15 [13:31]

5·18 민주화 항쟁이 있기 직전의 5월 16일 밤, 구 전남도청 앞 광장 분수대에서 광주시민의 가슴을 뒤흔드는 연설이 있었다. 바로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하던 박관현 열사의 마지막 연설이었다. 

 

 

 1980년 조선대에서 연설 중인 고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 이올시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성회를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자는 것이요,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모두어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주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에서,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라남도 도민, 아니 우리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 온 누리에 이 횃불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 박관현 열사 기념비문 >

당시 박관열 열사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 서서 군사 독재를 불태우고 새로운 민주 세상을 밝히는 횃불 시위를 주도하며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을 선포했다. 끝없는 투쟁 의지를 불사르다 1982년 4월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50일간의 옥중 단식투쟁 끝에 사망한 박관현 열사의 민주화에 대한 불꽃 같은 의지는 아직도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고 있다.

 

제 37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의 이야기를 동생 박관우 씨를 만나 다시 들어보았다.

 

집안의 기둥 형 ‘박관현’

 

사회 운동가 박관우 씨

 

동생 박관우에게 목숨을 걸고 항쟁한 형 박관현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당시 저희는 경제적으로 아주 힘든 집안이었으나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들이 계셨죠. 또한 집안이 크지 않아 형이 있는 불갑과 제가 있는 염산에 집안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안에서 형은 검사를 해서 집안을 일으키는 기둥이었던 형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5.18항쟁은 커다란 사건이 되었던거죠. 당시 저는 중3 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여러 설들이 난무했던 혼돈의 80년 광주를 겪고 있었죠. 그땐 형이 전남대총학생회장이 되었다는걸 알고 있었기에 그 중심에 형이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확실히 체감 한건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평생 농사를 지으신 아버지는 내 결혼식 때 당신 하객이 천명이나 올 정도로 사회성이 굉장히 좋으신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가 불안해하던 우리를 놔두고 누군지 모르는 낯선 이와 함께 나가셔서 며칠 동안 들어오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돌아오신 후에도 거의 보름은 꼼짝 않고 누워 계시다 일어나 말없이 담배만 반복해 태우셨다. 우리는 묻지도 않고 오월을 숨죽여 살아갔다..”

 

언제나 군복 바지에 검은 야상을 입고 있었다는 그의 형 박관현은 동생에게 자주 웃어주던 자상한 형이자, 집안 시제 때 항상 솔선해서 지게를 담당하던 든든한 형, 그리고 검사가 되어 집안을 일으키는 기둥이었다.

 

형이 떠난 이후, 그와 함께했던 많은 동지와 지인들에게서 형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는 박관우 씨.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박관현 열사의 뜨거운 의지는 그렇게 동생 박관우 씨에게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민주화 운동가에서 사회운동가로 변신

 

 

한신대학교에 입학한 박관우 씨는 ‘한신문학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가 감춰진 광주항쟁의 진실과 군부 파쇼정권 타도를 외쳤다. 형의 뒤를 이어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그가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친구 강민호의 죽음 때문이었다. ‘평생 노동자로 살고 싶다’라며 공장에 들어갔던 친구의 죽음은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쉼 없는 노동시간과 박봉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현실에 눈을 뜨게 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복지에 대한 관심으로 대학 시절 학생복지를 위해 노력했고, 졸업 후 ‘강민호 추모사업회’와 ‘장학위원회’를 만들어 친구가 꿈꾸던 세상을 기억했다.

 

또한, 추모사업회를 꾸린 후엔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서 활동하며 전국추모사업연대회의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복지운동가로 꾸준히 활동하던 그는 1999년도 청소년을 위한 신문 ‘비타민’을 창간해 청소년 복지사업에도 앞장섰다. 2012년에는 사회복지와 인연을 맺고 사회복지사들과 아동 및 청소년을 위한 문화복지사업을 전개하고자 사단법인 힘찬동네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그를 통해 장애인 사회적응 지원, 저소득층과 다문화 가족을 위한 문화복지 프로그램 운영, 사회복지사를 위한 문화복지아카데미 실시 등 지역주민의 복지증진과 행복한 문화복지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꿈꾸는 사회개혁가

 

2015년 5월 18일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박관현 열사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오마이뉴스

 

최근 박관우 씨는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사회복지와 마을공동체운동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사회를 바꾸는 정치라는 영역은 먼일이었어요. 그러나 아침에 눈 떠 저녁에 누울 때까지 정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치의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직접 그 정치의 결정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치 참여를 통해 모두와 함께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박관우 씨.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쉼 없이 달리고 있는 그의 도전을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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