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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우리 민족을 세 번 배신한 역사적 사실(6)
미국CIA(중앙정보국)의 한반도공작정치의 실체.
 
이건흥 칼럼   기사입력  2017/06/18 [12:58]

미국은 해방과 동시에 이승만을 앞세워 국내공작정치가 시작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반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우리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순간까지 일본군과 목숨 걸고 처절하게 항일무장투쟁 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억지주장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흥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우리민족은 1905년 을사늑약이후 해방될 때 까지 40년 동안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그 순간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와 중국 러시아연해주에 이르기까지 국내와 해외에서 무장투쟁으로 끝까지 저항했다.

 

우리민족은 해방되는 그 순간까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3천명을 몰살시켰고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조선의열단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와 목숨 걸고 싸웠다.

 

똑같은 식민지통치를 겪었던 인도의 마하 드마. 간디는 영국을 향해 비폭력불복종운동을 전개했고. 베트남독립운동가의 아버지 호치민(胡志明)도 프랑스에게 자치국을 요구했을 뿐이다. 미국에게 식민지통치를 당했던 필리핀도 제대로 된 무장투쟁 한번 못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중남미의 멕시코에서부터 쿠바, 칠레, 아르헨티나까지 전 세계 어떤 식민지 국가에서도 우리민족과 같이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끈질긴 저항을 하며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간판을 끝까지 지키면서 주권을 포기하지 않은 민족은 전 세계우리민족 밖에 없다. 그런데 미국은 일본을 향해 처절하게 싸웠던 우리민족의 독립항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이 패망하자 국내질서를 바로잡고 새로운 독립 국가건설을 위해 김구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요인들은 중경(重慶)에서 귀국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해방직후 8월18일 미군이 제공해준 항공기에 미군연락장교와 임시정부선발대인 광복군제2지대장 이범석장군과 장준하, 김준협선생 등이 서울여의도비행장에 도착했으나 일본군들은 본국으로부터 맥아더사령부의 신임장 없이는 임시정부요원들의 입국을 불허한다는 명령을 받았다며 입국을 저지당하자 이범석장군은 분을 삭이려. 한강물을 반양동이 마신 뒤 장준하, 김준협선생과 함께 28시간 만에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임시정부요원들은 미국의 저지로 해방된 조국에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 이후 미군정의 질서 확립에 협력한다는 조건을 달고 온갖 핑계를 대가면서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을 연장시켰다. 중국에서 기차나 배를 타고 몇 시간이면 귀국할 수 있는 거리를 해방 된지 3개월 이상 중국에 머물게 하면서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을 미국이 의도적으로 막았다.

 

해방직후 우리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시기에 여운형선생이 새로운 독립 국가건설을 위해 건국준비위원회가 국민들의 전폭적인지지를 받으면서 조직되었으나 미군정에 의해 불법단체로 몰려 강제로 해체되어 국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 들은 김구선생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과는 정반대로 맥아더사령관은 미국하와이에 머물고 있는 이승만을 자신의 특별전용기를 보내. 1945년10월12일 일본 도쿄로 불러들여 이승만이 3일간 일본에 머물면서 맥아더사령관은 남한을 점령했던 하지장군을 도쿄로 긴급히 불러들여 3자 간의 비밀 회담을 통해 이승만을 남한의 지도자로 만들어 한반도분단에 대한 비밀공작을 꾸민 후 이승만은 하지장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귀국을 했다. 이승만의 정치외교고문으로 함께 귀국한 로버트 올 리버는 미국중앙정보국CIA요원 이었다. 는 사실을 동아일보가 2014년 4월14일 보도했다.

 

이승만이 귀국한 이후 비로써 중국에 머물고 있는 임시정부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이 허용됐다. 따라서 김구선생은 1945년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수모를 당했지만 국민들은 이승만귀국 때보다 김구선생귀국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이승만은 가까이 있는 중국의 김구선생보다 한 달 보름 앞서 귀국하여 친일파들과 함께 국내정치주도권을 장악하여 미국의 한반도 분단정책에 따라 남한을 강력한 반공국가를 건설하면서 일본이 물러가자 곧바로 새로운 미국의 친미정권이 들어섰다.

 

 

“이승만은 귀국직후 남한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설을 통해 공산주의자를 악성전염병과 같다며 어떠한 협력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조국의 분단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한반도 분단정책을 이승만은 충실히 이행했고, 반대로 김구선생은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조국의 분단을 막아야한다며 1948.4.19.북한에 들어가 김일성과 한반도통일정부구성을 협상하러 갔던 것이 원인이 되어 주한미군방첩대(CIC) 정보국요원이었던 친일파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셨다. 이것이 미국이 남한공작정치의 첫 시작이다. 미 중앙정보국 CIA한국지부 총책을 맡았던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가“한국의 분단은 미국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며 고백했다.

 

 

이승만을 한반도분단에 충분히 이용해먹고 4.19학생혁명이 일어나자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가 이용가치가 떨어진 이승만을 경무대로 직접 찾아가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던 외교문서가 중앙일보 1984년 4.19자 에 보도되어 미국이 국내정치에 직접 개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 외도 미국은 박정희의 5.16쿠데타의 묵인과 인혁당사건을 비롯한 장준하선생암살과 조용수민족일보사장 등 수많은 민주인사를 빨갱이로 몰아 죽이면서 박정희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 최악의 상태로 발전하면서 부마항쟁이 발생했다.

 

 

1975년 9월7일, 12월23일, 미국 뉴욕타임스 보도에 의하면 남한정부가 민주인사에 대한 탄압이 미국 국가이익에 해가 된다고 보도했으며 1973년부터 CIA한국지부총책을 맡았던 그레그씨는 “나는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있다.” 고 증언하면서 박정희가 암살당할 것 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결국 박정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당했다.

 

미국이 국내공작정치에 개입한 결정판이 전두환정권의 등장이다.


1980년 5.18광주학살은 미국이 한국의 군사 작전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미군사방위조약에 의해 미국정부의 승인 없이 한국 군인이 독자적으로 대규모 군대이동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20사단의 광주투입과 제7공수여단의 공수특전단을 광주로 파견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시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의 묵인방조로 광주학살이 저질러졌다.

 

 

“1980년5월27일 공수특전단이 광주도청진압당시 미국정부와 전두환 신군부가 일정을 협의했다.”고 미국탐사보도 전문기자인 팀 샤록(Tim Shorrock)이 '체로키파일'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팀 샤록은 2015년5월26일 국회 정론관에서 권은희 새정치민주연합의원을 비롯한 야당국회의원 8명과 함께 '5.18비밀문서폭로' 기자회견에서 1996년 미국무부 비밀해제문건내용에 담겨있는 당시 카터대통령과 전두환 신군부사이에 오간 비밀문서인 “체로키파일”을 공개했다.

 

미국정부의 묵인방조로 광주학살이 저질러졌기 때문에 80년대 대학생들의 반미감정이 극렬하게일어나 미국에 대한 저항으로 1985년5월 미문화원을 점령하여 불을 지르고. 미국문화원이 공격대상이 되어 전두환정권집권기간 동안 전투경찰의보호를 받아야했다.

 

미국의 끊임없는 공작정치의 실체를 파악한 대학생들은 반미감정이 극에 달했다. 상징적으로 88서울올림픽당시 소련과 미국의 남자농구준결승전에서 당시 대학생은 물론 의식 있는 민주시민들이 공산국가인 소련을 응원할 정도로 반미감정이 심각했다. (7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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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18 [12:58]  최종편집: ⓒ 서울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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