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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테레 만행을 통해 본 ‘눈먼 자들’의 세상

주류·기득권자들의 정신수양, 발상의 대전환 − ‘의식혁명’ 실현

권혁시 칼럼 | 기사입력 2017/06/28 [03:21]

IS 테레 만행을 통해 본 ‘눈먼 자들’의 세상

주류·기득권자들의 정신수양, 발상의 대전환 − ‘의식혁명’ 실현

권혁시 칼럼 | 입력 : 2017/06/28 [03:21]

‘의식혁명’을 실현하여 본성·본분을 찾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

 

악명 높은 IS(이슬람국가, 이슬람 Islam 수니파의 극단주의 무장단체)의 만행, 그 배후가 확실시되는 2015년 ‘11·13 연쇄 자살 폭탄테러’에 의해 파리의 식당, 카페, 극장 등 6곳에서 130명이 사망하고 350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에 프랑스, 유럽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그 악몽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천인공노할 IS의 폭거는 그칠 줄 모른다. 

 


이렇게 머나먼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굳이 반추하는 까닭은, 그 잔악함에 참담한 심정으로 인간에 대하여 다시금 심한 회의를 품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금수가 아닌 사람이 이다지도 잔인무도할 수 있는가? 과연 인간본성은 맹자가 말한 성선인가, 아니면 반대로 순자의 성악설이 맞는 것인가?

 

영국에서는 2017년 3월 22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브리지에서 행인 5명이 차에 치어 살해됐고 경찰이 칼에 찔려 부상을 입었다. 5월 22일, 미국의 포크싱어 아리아나 그래이드의 콘서트 중에 IS의 조정에 따른 범행으로 보이는 자살 폭탄테러가 감행되어 22명이 사망하였다.


그전에 프랑스에서는 알카에다에 연관된 무장괴한 3명이 풍자주간지 ‘샤를리엡도’의 사무실에 침투하여 총기를 난사, 12명 사망하고 5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2015년 1월 7일). 그 이튿날, 파리교외에서도 IS의 배후로 여겨지는 한 남자가 경찰관 2명을 죽이고 유대인의 슈퍼마켓에서 인질극을 벌여 4명의 시민을 살해하였다(1월 8일). 


그밖에도 급진적 이슬람교도들의 테러가 연속됐는데 여성 1명을 살해하고(2015년 4월), 택배회사 사장을 참수 살해하였으며(2015년 6월), 암스테르담·파리 구간의 탈리스열차를 공격하여 2명이 부상을 입었다(2015년 8월). 이어서 130명이 목숨을 잃은 예의 ‘11·13 연쇄 자살 폭탄테러’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그 이듬해(작년)인 2016년에도 파리 북서부지역 마냥빌에서 IS를 추종하는 한 남성이 경찰관 부부를 칼로 찔러 살해하였고(6월), IS가 배후라고 주장하는 폭력사태가 연속되었다. 니스 축제에서는 트럭이 군중에게 돌진하여 86명이 사망하고 4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으며(7월 14일), 2명의 무장괴한이 성당에 침입해 인질극을 벌이다가 85세의 노신부를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6월 26일). 


그리고 벨기에, 독일, 스웨덴 등지에서도 테러가 연발하였다. 같은 해에 벨기에의 브뤼셀 지하철역과 공항에서 IS의 자살테러로 32명의 사망자와 340명이 넘는 부상자가 생겼으며(2016년 3월 22일), IS가 배후라고 주장한 남성이 경찰관 2명에게 칼을 휘둘러 여성 경관 1명이 안면에 상해를 입기도 하였다(8월 6일). 


독일 베를린의 크리스마스 시장에서는 철근을 실은 19톤 트럭이 쇼핑객들을 덮쳐 12명이 숨지고 56명이 크게 다쳤다(12월 19일). 또한 시리아 난민의 자살 폭탄테러로 15명이 부상을 당했고(7월 24일) 2017년 4월 7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최대 번화가인 드로트닝가탄에서는 트럭을 탈취하여 군중에게 돌진, 5명을 살해하고 15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잔악한 테러가 IS에 의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증할 범행, 그 만행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가운데 2014년 6월, IS 지도자 아부바크르 알바 그다디가 라마단(금식성월 禁食星月)을 맞아 이라크의 유서 깊은 이슬람성전 ‘알누리 대모스크’에서 신정일치 체제의 ‘칼리파 제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지난 6월 21일(현지시간), 모술 탈환작전을 벌이는 이라크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IS는 근거지로 삼았던 이 모스크를 가차 없이 폭파시켰다.


알누리 대모스크는 12세기 후반기에 건립된 이래 여러 차례 증·개축되었으며, 화폐에도 그려질 만큼 이라크 모술을 대표하는 귀중한 유적이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년)에도 건재하였으나, IS의 폭거 탓에 모스크 명물로 높이가 45m인 기울어진 첨탑(미나레트)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라크군 사령관 압둘 아미르 얄랄라흐는, “모스크에서 15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는데, IS가 모스크를 폭파하면서 또 한 번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BBC). 그러나 IS를 대변하는 아마크통신은 “알누리 모스크는 미군 공습에 파괴됐다”고 강변하는 어처구니없는 난센스를 연출하였다. 


작년에 142명의 테러 희생자는 가운데 90퍼센트가 넘는 135명이 이들 지하디스트(성전聖戰 주의자)의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유로폴, ‘EU 테러 상황 및 동향 연례 보고서') 이처럼 최근 유럽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자(IS 추종자들, 또는 자생적 테러리스트 ‘외로운 늑대’)들의 연이은 테러에 일상이 위협받고, 그들이 ‘자폭성지’로 삼은 유럽 국가들의 불특정 민간인들은 ‘소프트 타깃’(soft target) 테러의 대상이 되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IS, 이슬람 근본주의의 빗나간 종교의식(意識), 
반면교사삼아 반성, 성찰을 통한 사고방식·행동양식 정립

 

특히 라마단 시기(5월 27일~6월 25일)에 IS를 필두로 한 지하디스트의 테러가 폭증하는 현상이 중동 일원에서부터 유럽으로까지 확산되는 양상이다. 라마단 수일 전인 5월 22일, 영국의 맨체스터 공연장에서 시작된 테러는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런던브리지 테러(6월 3일), 런던 모스크 테러(6월 19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테러(6월 19일), 벨기에 브뤼셀 테러 시도(6월 20일)가 지속하여 자행되었다. 


유달리 라마단에 집중하여 테러가 빈발하는 이유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시기에 ‘순교’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때문이라는 것이다(IS 역시 이 시기에 맞춰 SNS를 비롯한 미디어를 통해 테러공격을 독려하는 지령을 유포한다). 그러나 냉정히 판단컨대, 이런 폭력행위는신성한 지하드(성전, 다신교도와 종교적 모독·박해 응징)의 수행과 라마단의 금식의식에 대한 역행이며 평화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이슬람 교의에 반한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슬람교도의 유일신 알라에 대한 5가지의 기본의무는, “나에게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은 없으며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도다” 이렇게 외치는 샤하다(chahada, 신앙고백)를 비롯하여 살라트(salat, 기도), 자카트(zakat, 희사·자선), 사움(sawm, 금식), 하지(hajj, 성지순례) 등이다. 이 다섯 가지 신과의 관계·규정 가운데 금식(사움)을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한 달 동안 행하며, 이는 ‘본능적 욕구’를 자제하고 ‘신앙의 근본가치와 원천’의 회복을 추구하는 정신적 금욕의식이다. 


더구나 이와 같이 지하드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이슬람교도의 기본의무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이토록 인간이란 우매하다 못해 잔인해지기 십상이다. 그것은 탐욕과 집착, 교만과 이기심에서 발로한다. 그래서 하찮기 그지없는 권력에 눈멀고, 부(富)에 눈멀며, 명예욕에 눈머는 것이다.


지고지순한 창조주, 유일한 하느님 ‘알라’(Allah)의 뜻을 따라 인간본성, 선의지가 남달라야 할 신앙인, 무슬림들조차 맹신과 독단, 곧 근본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 눈멀어 이성을 잃고, 금기의 폭력일 뿐인 맹목적, 광신적인 지하드를 진정한 신앙행위로 착각하는 것이다. 


“참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은 눈이 아니다. 가슴속에 있는 마음이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코란 22장 47절) “부와 자손은 이 세상의 장식품일 뿐이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것은 너희의 하느님이 보시기에 더 나은 보상이며,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이다” (18장 47절) “그 자신이 이기심에서 벗어난 자 − 그러한 자가 성공하는 사람이다” (59장 10절)


그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지하드를 미명삼은 과격한 전통주의(rad trads)에 경도된 테러리즘이 자행하는 폭력에 피로 물든 라마단과, ‘하느님 앞에 엎드리는 곳 − 마스지드’(masjid, 모스크)의 파괴를 누구보다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은 무슬림이다. 그들은 “테러리스트들은 진정한 무슬림이 아니다”라며 세상 사람들의 극렬한 비난에 절규하듯 항변한다. 최근 쿠웨이트의 통신회사 자인(Zain)이 올해 라마단에 즈음하여 내보인 영상광고가 이목을 끌었는바, 그 메시지가 마음마저 끌어당겨 가슴속 깊이 와 닿는다. “테러가 아닌 ‘사랑’으로 하느님을 섬겨라!”

 

생각건대 IS의 테러 만행을 보면서, 극단적이고 근본주의에 경도된 빗나간 종교적 신조를 반면교사삼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되찾고, 본연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바로 잡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정신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인간은 본디 선한 존재일 것이나, 니일 플래너건(저서 ‘구원의 역사’)의 해석에 의하면 “극도의 교만과 역천(逆天, 하늘의 뜻에 대한 거역인바 ‘하늘에 순명하는 자는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다. 順天者存 순천자존 逆天者亡 역천자망. 맹자), 바로 그것이 인간의 타락을 촉발시켰고, 악의 세력을 인간세에 개입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악’의 세력 자체와, ‘죽음’에 이르는 ‘죄’와, 죽기 전에 겪게 되는 ‘병고’ 등, 4가지의 무서운 현상이 인간의 삶을 짓누른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구원’이 절대로 필요하게 되었다고 플래너건은 말한다. 또한 데이비드 호킨스(저서 ‘의식혁명, Power VS Force’)는 깊은 명상, 특히 정신수양을 통하여 내재된 진실한 힘(power)인 잠재력, 이른바 인간본성(선의지·양심)을 끌어내어 눈에 보이는 전쟁(폭력), 조작, 법률과 규제 등 억지, 곧 표면의식의 힘(force)을 눌러 이김으로써 최선의 것을 이룰 수 있는 에너지가 충만한 가운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나갈 것을 가르쳤다. 요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주류·기득권자들의 정신수양, 발상의 대전환 − ‘의식혁명’ 실현
− 도덕적 의무,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실천

 

그러나 안타깝게도 IS가 말해주듯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이며, 폭력으로 점철하여 왔다. 그런 까닭은 플래너건의 해석처럼 인간의 교만과 악의 세력의 획책 때문인가? 어떻든 ‘인과율’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틀림없이 모든 사태 또는 결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예컨대, IS의 발호는 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정권이 권력유지의 구실을 위해서 조장한 결과이다. 즉 세속주의 세력을 표방하는 아사드정권과 강력한 이슬람주의 무장 투쟁세력 사이 극한의 대립구도를 의도적으로 획책하였다. 이에 더하여 시아파가 장악한 이라크정부의 배타적 종파주의에 대한 수니파 아랍계 시민들의 불만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아랍국가(정권)들의 방조가 IS의 발호를 부추긴 원인인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떠한가. 상업주의, 물질만능(배금)주의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이렇듯 배금주의가 상업주의를 낳고, 이를 천민자본주의가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잉태한 것은 완악한 ‘힘의 논리’에의 경도, 지배 현상이다. 그것의 중심 세력은 ‘권력과 재력’, 그리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들과 ‘악’의 세력이며, 이로부터 ‘위선과 독선과 교만’이 분출된다. 


그리하여 탐욕과 이기심에 눈먼 주류·기득권 세력이 무원칙과 부조리에 깊이 빠져 ‘불의, 부정부패’를 만연시켰다. 도덕성과 사회정의가 크게 실추되었고, 극심한 ‘불평등’을 야기함으로써 분열과 갈등, 민생불안이 증폭되는 상황이다. 정치, 경제를 위시한 국가경영 전반이 총체적 난국(crisis management)에 처한 것이다.

 

그럴진대 경제·경영인들이 이윤추구에 눈멀어 천민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의 폐단에 편승하여 빈부격차, 양극화를 조장하지는 않았는가? 관료·공직자들은 무사안일에 눈멀지 않았는가, 하여 복지부동하며 소신 없고 무책임하지는 않은가? 교만과 이기심에 눈먼 정치인들은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겸허히 반구저기(反求諸 己)하지 않고 서로 남의 탓만 하며 언제까지 ‘협치’를 외면할 것인가? 언론인과 학자들이 기득권과 권력에 눈멀어 본분을 외면한 채 딴소리하며 한눈팔지는 않았던가? 


법조인들은 기득권 유지, 행사에 눈먼 나머지 지조 없이 권력에 맹종하며 정의감을 잃지는 않았는가? 기복신앙에 눈멀어 성직자가 고난과 희생봉사를 회피하며 사랑과 자비를 저버리고 웰빙 종교인으로 전락한건 아닌가? 교육자들 역시 재물과 안일에 눈멀지 않았는가, 그래서 백년대계의 교육이 상업주의에 농락당해 돈벌이 수단으로 타락하는데도 수수방관했던 건 아닌가? 게다가 혹자는 재정정책을 통하여 ‘저성장, 불균형’ 경제구조를 변혁시킴으로써 경제활성화에 의한 고용안정과 소득균등의 실현을 ‘경제민주화’로 오인하여 이를 아직도 고집, 고수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허위, 억지의 힘인 ‘표면의식의 힘’(force)을 꺾지 않으면 권력과 재력에 의해 불의가 난무하고 폭력이 자행된다. 이 불의한 세력과 흉폭한 현상을 제압하고 타파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순수한 인간본성의 ‘잠재력’(power, 선의지·양심·도덕성·진리· 정의·원칙 등의 내적의식)의 발출 뿐이며, ‘표면의식의 힘’이 이 잠재력을 결코 이길 수 없다(데이비드 호킨스, ‘의식혁명, Power VS Force’).


그러므로 바라건대, ‘악의 세력’에 휩쓸리기 쉬운 권력자들과 재력가들, 즉 넓은 의미의 주류·기득권자들은 니일 플래너건의 ‘구원의 역사’(성찰, 회개)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의지하거나, 그것이 어려우면 데이비드 호킨스이 강조한 인식전환과 정신수양 등을 통하여 선의지, 인간본성을 되찾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했으면 한다. 그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대전환(전회 轉回)이며, ‘눈먼 자들’이 보게 하여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는 ‘의식혁명’의 실현인 것이다.

 

대한글씨검정교육회

권혁시 이사장

목하, 우리나라는 다른 문제들은 차치하더라도 내수경기의 침체, 불황과 그로 인한 서민대중의 민생고가 극심한 지경이다. 하여, 부연컨대 ‘경제활성화’를 통한 경제위기의 극복, 타개를 위해서는 분배정의, 곧 ‘최소극대화(最小極大化)의 원칙’으로써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J. 롤스, ‘정의론’). 그래서 위정자·경제인들이 ‘정의’의 정립에 앞장서며, 약자를 배려하고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데 진력해 주길 간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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