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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이 쓰는 변명 (4)

"박정희,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를 이어 뼈속까지 대구사람이겠다"고?

이원표 칼럼 | 기사입력 2017/06/30 [03:16]

독립운동가 후손이 쓰는 변명 (4)

"박정희,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를 이어 뼈속까지 대구사람이겠다"고?

이원표 칼럼 | 입력 : 2017/06/30 [03:16]

 


왜곡의 방정식

 

우연한 기회에 나는 프랑스정부장학생으로 연수학생이 되었다.

당시 이산가족 찾기에 온 국민이 밤을 새워 눈물 흘리던 시기, 방송 현업에서 벗어남이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 선후배 동료 분들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도 변변히 못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당시 항로는 '알라스커 앙커리지'공항에서 재급유를 받았고 승객은 지정된 장소에 머물 수 있었다. 잠시 쉬는 동안 공항로비에서 '우동'이라 표기된 한글이 그리도 반갑고 자랑스러웠던지....

 

그 해는 1983년 초여름이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는데 억센 경상도 사투리와 함께 한 무리의 두런거림이 들렸다. 지나치려는데 들리는 소리, "KBS가 이렇고 저렇고"... 이크 이게 웬 소리? '앙커리지'에서 들리는 웅성거림은 KBS 직원이던 내게, 무시하며 지나칠 수 있는 인내심을 순식간에 빼앗아갔다.

 

그들은 프랑스로 연수교육을 받으러 가는 프랑스정부장학생 중 일부로 해외여행 길이 초행이었다. 프랑스문화원에서 연수에 대한 브리핑 중에 해외 경험이 있는 KBS 직원을 찾아 안내를 받으면 무사히 입국 할 수 있다했단다. 마침 '007가방(요즘 젊은이들이 알까?)'에 KBS라 이니셜이 찍혀 있었고 KBS 직원을 찾던 연수생들의 눈 그물에 포착된 그 사람의 이름은 '김범수'.

 

우린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뿐이다.

 

입국심사

'샬 드골'공항에 무사도착한 우리는, 아니 나는 무슨 개선장군처럼 열 명 남짓 남녀 젊은이를 거느리고 입국심사대 앞에 섰다. 그런데 내 프랑스 말은 몹시 서툴고 짧았다. 심사관의 질문이 있었다.

"어떤 목적으로 왔니?"

"연수 목적으로 왔다."

"직업이 뭐니?"

"나는 피디다."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심사관은 내 뒤에 늘어선 일련의 한국인들을 가리켰다. "제들은 뭐니?" 언어의 빈곤함에 겁먹은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둘러댔다. "제들은 나와 동료인 피디들이다." 심사관은 얼굴도 들지 않은 채 우리 일행(?) 모두의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었다.

 

나는 잠시 잠간 영웅이었다. 내 말 한마디로 방송인 신분이 되어 까다롭다는 입국 심사대를 삽시간에 통과했으니 어찌 아니 그럴 할 손가? 나의 의기양양함은 겸손함을 덧붙여 하늘을 찔렀다. 그렇게 며칠 후 진짜 프랑스인을 만난 나는 제대로 걸려들고 말았다.

 

"네 직업은 뭐니?"

"나는 피디다"

 

내 대답을 듣던 그의 표정이 입국 심사관의 표정이 되어 날 한참 응시한다. 승전보 같은 나의 앞뒤 이야기를 듣더니 알았다는 듯 중요한 프랑스 말 한마디를 가르쳐 주었다.

 

'피디'가 프랑스 발음으론 '빼데'가 된다. 그런데 프랑스 말로 '빼데'는 영어로 '호모(동성애자)'라는 뜻이다. 나는 프랑스에 입국해서 계속 '빼데 빼데'를 외치며 다녔다. 최소한 닷새 이상을...

 

그 친절한 프랑스 남자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내게 새로운 단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레알리자떼' 프랑스의 알 발음은 반드시 가래 끓는 소리가 나야한다며 열심히, 열심히 '레알리자떼(재현하는 사람)'

 

자고로 '리더'를 잘못 만나면 그 집단은 한꺼번에 같은 취급을 받는다. 입국장에서의 일행은 한꺼번에 호모집단이 되었던 것. 그들은 의사, 간호원, 공무원, 수의사, 나 같은 방송인 등 직업이 갖가지였고 더구나 신혼부부도 있었는데...

 

어찌됐던 '리더'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잘못 만나면 곁에 있는 모두가 의심 받는다.

머리가 고단하면 수족이 고생한다.

 

연수

 

이원표, 독립운동가 후손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전 KBS 교양국 프로듀서

어학연수가 끝나고 후반기 교육을 '쁘와띠에'대학에서 전공연수를 받았다. '쁘와띠에'는 프랑스 서북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프랑스 굴지의 의학대학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고 '잔 다크'가 형을 받은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한국인은 나 하나 밖에 없었다.

 

교육의 마지막 평가는 일주일을 주며 프로그램 한편을 우리말과 프랑스 말로 완성하여 제출하게 된다.

 

난 자칭 생방송의 대가가 아니었던가?

너무나 쉬웠다. 매일 생방송을 하던 나였으니까, 절약한 시간을 프랑스에 와서도 구경 못한 ‘파리'를 보리라는 생각에 부풀어 있었는데...알 수 없는 이유로 피 같은 몇 날이 지나 담당주임교수의 호출이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궁금해 하며 만나기로 한 편집실로 갔다.

 

주임교수 왈 "너희 는 몇 개의 언어를 사용하니?"

"하난데?"

"아닌데?" 기가 막힐 일이다. 아니, 우리말이 몇 개라니? 그런데 증거가 있단다. 그리고는 가져온 두개의 테이프를 내어 준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학생이고. 교수의 명은 짧고 간결했다. "틀어!"

 

테이프는 돌기 시작했고 거기선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막 쏟아졌다. 또 하나의 테이프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전, 한국인 학생이 만들어놓고 간 테이프와 그전 또 하나의 한국학생의 테이프는 중국말보다 악센트가 강했고 나의 말 쓰임은 너무 부드러워 일본어 비슷해서 자신들은 한국이 몇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지 궁금하여 새로운 발견이라는 것이다. 본보기로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는 것.

 

하마터면 우리말의 표준어가 경상도 語로 될 뻔?

해외 나가기가 하늘에 별 따기 같던 시절이었다.

그땐 왜 경상도 사람이 해외가기 쉬웠을까?

아! 과연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경험했을까?

 

30년 전 오늘,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중견 방송인이 되려면 꼭 거쳐야하는, 개인의 의식과 사상을 바꾸고 점검 받기 위한 언론인 연수 111기, 그날 예정 장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이른바 629선언을 들었다. 그마저 도루묵이었지만.

 

오늘도 그날의 악몽은 이어지고 있다.

홍준표가 말했다 한다.

"박정희,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를 이어 뼈속까지 대구사람이겠다"고?

이런, 젠장!

 

※참고 : 이 글에서 필자는 동성애나 양성애, 이성애를 비교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역시, 어느 지역 사람들을 폄하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다만 내 시대의 아픔이 내가 사랑하는 자녀와 후손들의 아픔이지 않기를 바라며 있는 그대로를 표현코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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