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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우리 민족을 세 번 배신한 역사적 사실(마지막)
해방이후 한국인들이 반미감정을 품게 된 3가지 원인.
 
이건흥 칼럼   기사입력  2017/07/10 [14:54]

맥아더사령관 포고령제1호

 

첫째: 해방직후 미국정부는 남한을 점령한 미군에게 ‘조선인을 적국의 국민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서를 전달했고 한반도 전역에는 비행기로 맥아더사령관 포고령1호를 삐라로 살포하면서 포고령을 통해 미군은 스스로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이 땅에 들어왔다’고 정확하게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현실로 나타났다.

 

1945. 9. 8. 인천항부근에서 미군을 환영하기위해 나왔던 군중을 향해 친일경찰의 총격으로 인천지역 항일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의 핵심인물이었던 권평근과 이석우가 즉사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정은 조선인들을 죽인 친일경찰들을 무죄 석방시키자. 미군을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인식하면서 반미감정이 심각 했다.

 

미군환영행사 모습. 일본경찰의 환영인파에 대한 발포로 권평근과 이석우가 즉사하고 14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둘째: 해방 된지 이틀 만에 독립운동가 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여운형선생이 일본이 물러가자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기위해 건국준비위원회’가 독립운동가 중심으로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두어 일본을 대신해서 치안유지까지 감당 했으나 미국이 남한을 직접통치하기 위해 불법단체로 몰아 강제로 해체시켰다.

 

그리고 여운형선생은 친일파손에 의해 암살당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직후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폭발적인 기대를 갖고 국민적 조직으로 탄생했으나 미군의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참혹하게 해체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탄압은 한국인의 자주성과 자존심에 대한 탄압이었다. 자신의 가족이나 이웃이 참여한 건준세력이 미군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지켜본 한국인들은 미국이란 존재가 일본식민지지배의 연장선상이라고 인식했다.

 

셋째: 한국전쟁당시 양민학살의 주범은 북한군이 아니라 미군이었다. 한국전쟁을 직 접 경험했던 그 당시 10대 중반이상의 많은 분들이 “양민학살은 인민군이 아닌 미군이 했다.”고 증언했다. 대표적 사건이 ‘老斤里良民虐殺事件’이다.

 

피카소가 그린 노근리 양민학살. 6.25때 미군만행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을 고발한 영화《작은 연못》이 제작되었고. ‘CNN방송’과 문화방송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AP통신’ 에서 끈질기게 보도하면서 양민학살의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한국전쟁당시 북한군이 양민학살에 주범이 아니라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모택동의중공군은 중국대륙에서 內戰이 벌어졌을 당시 장개석국민당군의 대대적인 추격을 피해 1년간 광동, 호남, 광서, 운남, 사천등 11개성을 지나 18개의 산맥을 넘어 중국대륙을 남쪽으로 반 바퀴 돌면서 옌안에 도착할 때 까지 1만km의 3만리 대장정의 고난의 행군을 마무리한다.

 

모택동의 혁명이론은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향토농민을 기반으로 했다. 일본육사를 나온 장개석총통은 서양의 전투방식으로 중국대륙의 땅에 점령을 우선시 하였지만, 모택동은 군대가 점령해야 할 것은 땅이 아닌 사람의 마음이라 믿었다.

모택동군을 추격해오는 장개석군은 가는 곳곳마다 민중을 멸시하고 약탈했다. 그러나 모택동군은 인민의 마음을 얻으려고 무한히 노력했다. 모택동은 공산홍군이 민간인에게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까지도 군법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공산홍군과 마을사람들이 평화롭게 상견례를 하고 있다.

 

공산홍군은 마을농민들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으며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바늘 하나라도 손대지 않았고 말고삐를 묶은 기둥이 파손되면 기어코 고쳐주었다. 떨어진 문짝이 있으면 자신들이 달아주었고 얻어먹은 밥값을 하기 위해 농사일도 거들었다. 어쩔 수 없이 농민의 재산을 사용해야 할 경우 부도수표가 될 확률이 많지만 군표를 발행하여 훗날 조국이 해방되면 반드시 갚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들이 쌓이고 싸여 백만 명의 장개석 군을 섬멸하는 戰果보다도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몸으로 보여준 공산홍군의 전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중국대륙에 깨알처럼 흩어져있던 수억의 농민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결국 중국대륙의 거친 들판에서 일어난 한 줌의 반란세력이었던 모택동공산홍군은 여론의 돌풍을 일으켜 마침내 1949년 10월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 이러한 민중의 여론이 무섭다는 것을 일깨운 북한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과 북한군이 양민학살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www.history.go.kr)한국사 데이터베이스.<자료: 대한민국사> 제20권에 실린 문서에 따르면 全美해군요리사 기관지인<보이스>1951년2월23일자 보도에 주한미 해군잠수함 빅토리호 승무원들의 인터뷰기사가 소개됐다. 미 국무부행정관 니콜슨이 한국인들이 미국인에 대한 반미감정을 미 국무부에 여과 없이 보고했던 내용 중에 어느 병사의 인터뷰기사 중에 중요한 두 가지를 소개한다.

 

한국전쟁당시 미 국무부 문서의 요약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첫째: “한국인들은 미군을 싫어한다.”는 표현이다.

둘째: “나는 한국이 나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인터뷰 내용이다.

 

육상도 아닌 바다에서 활동하는 잠수함 승무원들조차도 자신들이 한국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으로 느꼈다면, 육상에서 전투하는 주한미군병사들은 한국 내에 반미감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조성되었는지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한국인들은 미군을 싫어한다.”는 표현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이 반미감정에 익숙해 있다는 것을 확인 알 수 있다.

 

 

이건흥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결론적으로 <보이스>신문기사나 미 국무부 문서에서 밝힌 대로 한국전쟁당시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에 한국전쟁당시 한국인들이 미국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다면, 미 해군 잠수함승무원들에게까지 한국인들이 그렇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겠는가!

 

그리고 이런 심각한 반미감정보고서가 미 국무부에 보고되었다는 것 자체가 한국전쟁당시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반미감정이 심각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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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10 [14:54]  최종편집: ⓒ 서울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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