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와 이승만

자신의 조국을 ‘Japan’으로 표기한 이승만

이건흥 칼럼 | 입력 : 2017/07/16 [02:47]

지난 백년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우리민족에게는 참으로 많은 위대한 선조들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중에서도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다.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아우슈비츠보다 무서운 것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것보다 더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역사를 ‘알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잊는다.’ 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는 의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우리의 역사를 알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

 

신채호 선생이 피눈물로 쓴 ‘조선상고사’ 말머리에 첫 번째 쓰인 말씀이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고 하셨다. 그 나라에 시저 같은 영웅이 있어도 국민이 알지 못하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며, 그 나라에 나폴레옹 같은 인물이 있어도 국민이 알지 못하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말씀하셨다.

 

고령신씨인 신채호 선생은 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18대손으로 충청남도 대덕군 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9세에 ‘자치통감’을 13세에 ‘四書三經’을 독파했으며 26세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황성신문’ 기자로 입사하여 민족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신채호 선생은 중국 길림성 집안의 서간도 지역에 흩어져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한 후 "내가 속았다. 고구려 유적을 한번 보는 것이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고구려 역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큰 감동을 받으셨다. 따라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비판하면서 ‘조선상고사’를 집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채호 선생은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장인 조선의열단장 김원봉 장군의 부탁을 받고 민족혁명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문’을 집필해 ‘강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았으니 일본을 말살함’이 우리의 정당함을 선언했다.

 

신채호 선생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무국적자였다. 그 이유는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2백여 명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 올리기를 거부하면서 무국적 상태로 살아왔다. 

 

호적제도는 최근에 바뀌어 가족관계 증명원으로 대체되었지만. 일제 때부터 시행된 전 세계에서 일본만 쓰는 행정 제도로 식민지 백성을 거부한 독립운동가 들이 일본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국적자로 살아왔지만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이 신채호 선생의 국적회복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이승만과 신채호 선생은 물과 기름같이 원수지간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들은 신채호 선생의 국적회복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다.

 

그 원인은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원칙이 발표되자 많은 독립운동가 들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다는 기대를 갖고, 1919년 1월에 김규식 선생을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파리 강화회의는 1차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전범국가인 독일처리 문제와 함께 식민지 국가에 대한 독립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고종은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 되었고. 또다시 1919년 1월 18일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 선생을 파견하자 그해 1월 21일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

 

이승만은 1919년2월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해달라고 청원서를 보냈다.

 

이승만은 1919년 2월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보다는 위임통치를 해달라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이렇게 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국내외 모든 항일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승만은 미국이 일본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그 대신 우리나라를 위임통치를 해달라는, 일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바꿔달라는 위임통치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것이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은 해방과 동시에 미국이 남한을 점령하여 3년간 직접 통치하는 명분을 주었고 남북분단의 원인 제공이 되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를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분이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신채호 선생은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을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라며.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미국에게 팔아먹었다며.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김원봉 장군을 비롯한 김창숙 선생 등 54명이 서명하여 발표했다. 결국 이승만은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오늘날 국회)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해임되었다.

 

이건흥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사무총장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칠가살(七可殺)즉 ▲일본인 ▲친일매국노 ▲친일경찰 ▲친일부호 ▲친일 관리(官吏) ▲친일밀고자(밀정) ▲민족반역자로 이들 7가지 족속을 민족의 이름으로 죽여도 죄가 안 된다고 발표했다. 단채 신채호 선생은 월슨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을 이들 칠가살과 다를 바 없다고 크게 분노하셨다.

 

신채호선생의 유명한일화로 세수할 때 허리와 고개를 굽히지 않고 그냥서서 손으로 물을 찍어 얼굴에 바르는 식이었다. 그렇게 세수를 하면 옷이 온통 물에 젖곤 하였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어느 방향이든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던 신채호선생의 자존심과 절개가 잘 드러난 조선선비의 모습이다.


신채호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으로 망명하여 민족사연구와 독립운동에 헌신하시다가 감옥에서 일생을 마치셨다. 신채호 선생은 중국 여순(旅順)감옥에서 형기를 3년 앞두고 뇌일혈로 쓰러져 병보석으로 감옥 문을 나설 기회가 있었지만, 석방이후 신채호 선생을 보호할 보증인이 고령신씨 문중의 친일파라는 이유로 신채호 선생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여 끝내 57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순국하셨다. 이러한 신채호 선생의 삶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이승만의 궤적(軌迹)을 살펴보자.

 

미국이 1918년 10월 1차 세계대전당시 징집자원을 파악하기위해 미국에 거주하는 미국인을 포함하여 모든 외국남성들까지 18~45세 남성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병역카드를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안창호 선생이 국권회복을 위해 신한민보를 창간하여 미주교포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한민보를 통해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조선인동포에게 항일운동의 표시로 병역카드를 작성할 때 반드시 국적 난에 'Korea'로 적으라고 당부를 했다.  

 

미국이 병역카드를 작성할 때 반드시 국적 난에 'Korea'로 적으라고 당부를 했다. 따라서 모든 미주동포들은 국적 난에 'Korea'로 적었는데 유일하게 이승만혼자서 자신의 조국을 ‘Japan’일본으로 표기했다.


따라서 모든 미주 동포들은 국적난에 'Korea'로 적었는데 유일하게 이승만 혼자서 자신의 조국을 ‘Japan’일본으로 표기했다. 이러한 이승만이 이듬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천만동포를 향해 대 사기극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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