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칠곡 금오산 기슭에서 악질 친일파 집안 영남제일의 대지주인 만석꾼의 아들로 장택상이가 태어났다. 이것과는 정반대로 박정희는 장택상집안의 논을 소작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두 집안은 경부선 철길을 사이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같은 고향사람이다.
해방 이후 장택상은 수도경찰청장, 초대외무부장관, 그리고 고향 칠곡에서 2대에서 5대까지 내리 네 차례나 국회의원에 당선하여 국회부의장, 제3대 국무총리 등 대통령만 빼놓고는 대한민국의 고위요직은 다 차지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것과는 반대로 박정희는 출생부터 한편의 비극적인 드라마처럼 비참했다. 일제시대에는 초기조혼으로 마흔 살이 넘으면 며느리나 사위를 보고 긴 담뱃대를 물고 노인행세를 하던 시절에 박정희어머니는 45세에 아이를 가졌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우선 시집간 딸과 함께 해산을 하자니 식구들에게 체통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네사람들에게 부끄럽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가없었다. 더욱이 가난한 집안에 자식새끼 육남매와 함께 여덟 식구가 남의 논을 소작하면서 근근이 어렵게 살아가는데 또 한 입 보탠다는 게 아찔했다. 그래서 박정희어머니는 임신초기부터 아이를 지우려고 온갖 민간요법을 다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뱃속 아이를 지우고자 남몰래 간장을 한 사발씩 수없이 마셔보기도 하고, 디딜방아로 꿈틀대고 있는 뱃속의 태아를 내리 처 보기도하고 높은 돌담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수양버들 강아지뿌리를 달여 마시면서.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아도 끊질 긴 생명이었던지 뱃속의 태아가 죽지 않자. 하는 수없이 혼자 아기를 낳은 뒤 이불에 돌돌 싸서 아궁이에 던지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자 막둥이가 귀엽고 그동안 자신의 소행을 뉘우치면서 어린 아기를 기르기로 작정했다.
이미 말라버린 어머니의 젖꼭지에서 젖이 나오지 않아 갓난아기 박정희는 밥물에 멀건 죽을 먹으며 자랐다. 그래서 박정희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체구가 몹시 작았다. 소년 박정희는 가을추수가 끝나면 둘째형 박무희가 지게에다 논밭을 빌린 소작료로 줄 쌀과 마름에게 줄 뇌물 씨암탉을 지고 소년 박정희와 함께 장택상 아버지인 장승원집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소작인의 막내아들이 5.16쿠데타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장택상이가 볼 때는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었다. 소작인의 아들하고는 상대도 하지 않았던 장택상이가 그렇게 하고 싶던 대통령을 소작농의 아들이 대통령을 하다니. 장택상은 박정희를 극도로 비난했다.
장택상씨가 고향 경북칠곡에서 2대에서 5대까지 내리 네 차례나 연속해서 70% 이상의 유효 득표율로 압도적으로 당선된 장택상의 텃밭에서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 또다시 입후보하자 박정희가 총재로 있었던 민주공화당은 무명의 정치신인 30대 송한철을 내세워 보기 좋게 낙선시켰다.
선거에 진 가장 큰 원인은 칠곡 경찰서에서 장택상후보를 특별히 신변보호를 한다는 명분으로 무장경찰 네댓 명을 앞뒤로 경호를 시키자 시골사람들이 무장경찰을 무서워한 나머지 장택상후보유세장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때 악질친일경찰들이 독립군과 백성들을 탄압하고 해방이후 친일경찰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었던 것을 경험한 백성들은 어린아이가 울면 순사가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뚝 그칠 정도로 경찰은 백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무장경찰들이 장택상후보를 밀착경호를 하자 사람들은 무서워서 접근을 꺼려했다. 이렇게 해서 국회의원에 낙선한 장택상씨가 계속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번 선거는 대한민국민주주의가 패한 것이다"라고 박정희를 향해 계속독설을 퍼붓다가 그만 병이 들었다.
마침 미국에 있는 딸의 초청으로 신병치료를 위해 수속을 밟는데, 외무부에서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장택상은 냉엄한 권력의 현실을 깨달았고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각하 전 상서'라는 장문에 굴욕적인 항복 편지를 보냈다.
참조 기사: '정치경찰'의 원조 장택상의 막가파식 인생행로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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