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매국노 박정희와 5,16 군사반란 그리고 미국CIA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이건흥 사무총장 민족강연

서울의소리 | 입력 : 2017/10/13 [22:14]

2017년6월 문재인 대통령 외교안보 특보 문정인교수가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워싱턴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북한이 핵과 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한국정부는 한미군사훈련의 규모를 줄이는 방안을 미국과 협의할 수 있다.” 그리고 “사드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미동맹이 깨진다는데 그게 무슨 동맹인가”라고 발언을 했다.

 

문정인교수가 한 발언은 극히 상식적인 발언으로 우리민족의 자존심과 자주적인 입장에서 할 말을 했을 뿐이다. 역대정권에서 미국과 대등하게 이러한 자주적인 발언을 한 사래가 한 번도 없었다.

 

 

북한과 대화와 평화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토사광란증을 일으키면서 소화가 안 되는 남한의 반 통일세력인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과 친일, 친미세력들은 ‘미국정책에 거스른다.’며 온통 난리법석을 떨었다. 문재인대통령과 트럼프와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냐면서 문정인교수를 맹렬히 비난했다.

 

문정인교수를 비판하는 세력들은 한국사람이 아니라 미국인보다 더 친미적인사람들이다. 일제때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다운 친일파들이 해방이후 친미수구세력으로 변신했다. 우리민족의 통일문제는 우리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초석을 다진 것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된다.

 

지난6월 무주에서 개최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태권도 시범단과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평창 동계올림픽을 남북공동개최 하여 남북단일팀을 구성해야한다. 우리는 이러한 좋은 기회를 살려 조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해방이후 수십 차례 한미정상회담이 진행되었지만, 지금까지 한미양국 간의 대등한 위치에서 우리민족의 국익을 위해 미국과 동등한 조건으로 한미정상회담이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군사 쿠데타라든지 부정선거로 선출된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기 때문에 과거중국의 天子를 알현하러 가는 방식으로 미국이라는 대국에게 자신들의 부도덕한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 받기위해 미국의 천문학적인 무기구입을 목적으로 한미정상회담이 이루어 졌다.

 

이러한 피해는 일반서민들의 복지비로 써야할 세금이 미국무기구입비용으로 전환되면서 살기가 힘들어 세계자살률 1위 행복지수 꼴찌인 나라에서 살고 있다. 

 

 

2006년부터 2015까지 이명박근혜정권 10년 동안 한국이 미국에서 구입한 무기는 모두 36조원으로 세계에서 무기수입 1위를 기록했고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가 그 대가로 2014년 78억달러(9조원)규모의 미국무기구매 계약을 체결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상징적인 또 하나의 사건이 전두환과 레이건간에 이루어진 5분간의 만남은 외교상 결례일 뿐만 아니라 역대 한미정상회담 중에 가장치욕적인 수모를 당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한국 언론들은 5분짜리 한미정상회담을 두 정상 간의 의기투합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국민들의 앞도적인 지지기반을 갖고 1천7백만 촛불민심에 의해 국민의 힘을 바탕으로 탄생한 정권이기 때문에 미국과의 동등한 조건으로 열린. 최초의 한미정상회담이다. 따라서 한반도 통일문제라든가 한반도에서 우리에 승인 없이 어떠한 전쟁도 불가능하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전까지 미국이 한국에 대한 공작정치를 펼쳐왔던 사례를 살펴보자. 박정희에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30년 군사독재정권은 미CIA 공작에 의해 탄생되었다. 주한미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 그리고 미CIA 한국지부장으로 잘 짜여진  미국의 공작정치음모가 87년 이후에도 대한민국 정치사에 깊숙이 개입해왔다.

 

 

6월 항쟁으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종식시킬 절호의 기회를 김현희 KAL기 폭파사건 등으로 놓쳐버린 87년 대통령 선거, 2007년 BBK주가조작 사기사건을 덮어 버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 여기에도 미CIA 공작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2012년 국정원댓글조작으로 탄생한 박근혜 부정선거 의혹, 그리고 2017년 촛불대선에서 주한미군의 성주 사드 알 박기에 이르기까지. 비밀문서가 해지된 87년 이전까지만 입증이 가능했지만 87년 이후에 제기된 미국의 한국정치개입 의혹이 백일하에 들어나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 올 것이다.

 

 

지금현재 비밀해제기간이 지난 극비외교문서를 통해 미국이 한국정치에 개입해왔던 사실을 밝혀보자. 미국은 동북아에서 소련과 중국공산국가를 견제하기위한 수단으로 남한을 군사방위전략기지로 구축하기위해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을 등장시켰다. 이러한 근거가 비밀해제기간이 지난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는 남한의 공산화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미CIA 공작에 의한 작품이었다. 미국의 묵인과 공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국이 한국의 군사 작전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미군사방위조약에 의해 미국의 승인 없이 한국 군인이 독자적으로 대규모 군대이동이 불가능했다.

 

5.16쿠데타 당시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이 1961.4.24 박정희와 쿠데타문제를 논의했다고 케네디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미국의 공작과 묵인방조로 일어난 5.16쿠데타와 5.18광주학살이 우리민족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쳐는 지 살펴보자.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과 소련과의 냉전시대가 시작되면서 전 세계는 미. 소두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재편되었다. 그 동안 제국주의 강대국들에게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연안의 약소국가들이 독립하면서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사회주의공산세력이 경쟁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특히 동유럽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카메룬 그리고 아시아의 중국을 시작으로 북한, 베트남, 몽골, 미얀마 등 식민지국가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들이 소련의 사회주의공산국가로 급속하게 확대되어갔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위해 일본을 거점으로 하는 동북아 군사방위전략기지를 구축하기 위한수단으로 미CIA공작에 의해 일본의 보수정당인 자민당정권을 탄생시켰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직후 도쿄형무소에 수감된 전쟁범죄자들을 미CIA요원들이 전수 조사하는 과정에 지금현재 일본의 아베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가 “열렬한 반공주의자”이고,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을 알아내고 미국은 충분한 이용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기시 노부스케를 석방시켰다.

 

 

기시 노부스케는 자기 목숨을 살려준 미국이 생명의 은인으로 친미주의자로 둔갑해서 미국의 비밀공작원으로 활약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총무청 차장출신으로 태평양전쟁 A급 전범으로 도쿄형무소에 3년간 수감되었다.

 

태평양전쟁패전이후 일본의 군국주의 보수 세력은 전쟁을 일으킨 죄인취급을 받으면서 국민들에게 냉담하게 외면당한 반면 일본국내의 공산당을 비롯한 수십 개의 진보적 좌파정당이 일본국민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당황한 미국은 일본이 합법적으로 공산화가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시 노부스케를 앞세워 1955년 11월 CIA의 수십억 달러의 비밀공작금으로 진보적 좌파정당과 대적하기위해 만주국고위관료출신들과 만주군관학교출신을 중심으로 군국주의 전범세력을 통합하여 일본자민당정권을 창당해서 영구집권의 기틀을 만들어 1957년 2월 기시 노부스케를 일본총리로 화려하게 등장시켰다. 미국은 교수형으로 사라졌어야할 A급 전쟁범죄자인 기시 노부스케를 일본총리로 둔갑시켜 미국이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위한 수단으로 동북아 군사방위전략에 이용했다.

 

이러한 사실을 ‘뉴욕 타임스’ 팀 와이너 기자가 방대한 비밀문서를 분석하여 잿더미의 유산 CIA의 역사라는 책을 2008.5. 미국에서 출판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책 내용에는 한반도분단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과 아프간 이스턴 공격 그리고 오사마빈 라텐과 사담 후세인체포를 미국중앙정보국 CIA가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1960년 한국경제는 6.25전쟁 이후 미국으로부터 66억 달러의 가장 많은 원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1960년 한국은 1인당국민소득 79달러로 미국의 66억 달러의 원조는 온 국민이 일안해도 먹고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박정희가 한일회담을 통해 일본에서 받은 3억 달러의 22배가되는 엄청난 원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는 세계 최하위였다. 그 원인은 이승만정권의 리더십 부재와 미국원조의 단물만 빨아먹던 친일파출신 관료들의 지독한 부정축재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업시설인 생산설비에 투자해야할 “자립경제”가 아니라 먹고 쓰는 구호물자가 대부분이었다.

 

 

미국은 과잉생산 된 쌀을 비롯한 밀가루 옥수수 등 재고처리를 위해 바다에 버려야할 잉여농산물을 한국의 원조로 보냈다. 저도 어린 시절 천주교성당에서 주는 옥수수 죽을 먹은 기억이 있다. 미국의 효율적이지 못한 원조와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면서 4.19혁명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하면서 한국은 정치적 대혼란을 겪게 된다.

 


반면 북한은 소련 등 동맹국들의 지원으로 한국전쟁이후 3년 만에 전후복구는 물론 천리마운동이라는 피나는 노력 끝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1960년대 초 북한의 경제규모가 세계50위 옜고 남한은 101위로 세계 최하위였다. 이러한 현실에 미국은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남한의 가난한 백성들이 북한을 부러워하며 갑자기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미국은 매우 초조해 했었다. 

 

 

1960년대 미국케네디정권은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국가가 계속 늘어나는 원인을 분석한 결과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들이 공산화가 급속하게 진행된다는 공통점을 파악했다. 그 당시 미국의 코앞에서 1959년 쿠바혁명이 일어나면서 중남미가 사회주의공산화가 되었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모택동공산군이 장개석 국민당 군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대륙이 공산화가 된지 10년 만에 1960.10. 핵무기개발을 성공하여 동북아정세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미국은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세계전략은 소련 공산주의세력의 확대를 막고 중국포위정책을 위해 미CIA를 통해서 동남아나라들에게 경제원조를 지원해주면서 일본자민당정권탄생과 같은 친미정권수립을 위해 공작정치를 펼쳤다. 미국은 이승만 친미정권을 물리적시위로 강제로 쫓아낸 4.19학생혁명을 반미혁명으로 인식했고 조속히 남한에 친미정권을 수립해야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그 당시 발생한 반미 쿠바혁명 때문에, 쿠바혁명을 모방한 반미혁명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을 가장 크게 우려했다. 4.19학생혁명도 이러한 쿠바혁명으로 판단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남한이 쿠바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오기 전에 친미정권수립을 위해 미 중앙정보국 CIA공작이 시작되었다.

 

 

4.19학생혁명이후 무수히 많은 데모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어났고 그때 휴 팔리 보고서가 긴급히 올라왔다. 그 내용은 남한민중들의 반정부 심리가 반미감정으로 폭발해서 사회주의공산혁명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보고서 옜다. 그리고 한 달 뒤 61.4.11. 매가라기 주한미국대사도 긴급보고서를 올렸다. “지금현재 남한에서는 민족주의운동이 일어나면서 남북통일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서였다.

 

 

매가라기 대사의 보고서가 올라간 뒤 한 달 만에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켰다. 덜레스 CIA국장은 영국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쿠데타를 가리켜 자신이 재임기간 중에 CIA가 해외활동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공작이라고 자랑했다. 

 

미 국부무가 발간한 1961년부터 1963년까지의 미국의 대외비밀문서에 따르면 델레스 당시 미 중앙정보국 CIA국장은 1961년 4월21일부터 26일까지 ‘박정희소장이 쿠데타를 모의 중’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모두 8차례 작성했으며 날짜 별로 주요내용을 요약해서 케네디대통령에게 수시로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미국은 박정희의 쿠데타계획을 이미 파악하고 묵인 방조했다.

 

 

5.16쿠데타당일 새벽3시 장도영육군참모총장이 매그루더미군사령관에게 박정희의 쿠데타군진압을 요청했지만 매그루더사령관은 이를 묵살했다. 그리고 5.16쿠데타당일 오전10시 매그루더 미군사령관은 청와대에서 윤보선대통령을 만났지만 박정희의 쿠데타반란군에 대해 진압명령을 내리지 않고 묵인했다.

 

 

미CIA관리들은 5.16쿠데타직후 박정희에 관한 비밀보고서를 올렸다. 케네디대통령에게 제일먼저 보고된 정보는 박정희가 일제 때 한국민족을 배반한 민족반역자인 친일파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박정희는 자신의 동료들을 밀고해서 3백 명을 죽이고 자신은 혼자 살아남았다. 

 

 

이 사건 때문에 미군들은 박정희를 뱀 같은 인간이라며 스네이크 박 이라는 별명을 부처 주었다. 쿠데타의 리더가 공산주의자 옜다는 사실에 케네디 대통령 참모들은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1776년7월4일 미국독립기념일에 맞춰서 1961년7월4일 반공법 지금의 국가보안법을 선포했다. 그리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보이기위해 곧바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북한을 찬양했다는 누명을 쉬어 반공법을 적용해 10월31일 사형시켰다. 그 이후 조용수 사장은 47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박정희는 과거 공산주의자 옜다는 신분을 씻어내기 위해 조용수 사장을 희생물로 삼아서 자신이 얼마나 과격하게 반공정책을 수행하는지 미국에게 보여주기 위해 억울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CIA보고서를 통해 박정희가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킨 지 6개월 만에 1961년 11월 케네디대통령방문길에 일본을 들렀다. 이날저녁 박정희가 초대한 만찬회에서 만주군관학교에 다닐 때 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로장군을 만나자 선생님의 지도와 추천으로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여기까지 올수 있었습니다. 라고 말한 뒤 무릎을 꿇고 술을 따랐다.

 

 

이 자리에는 이케다 총리를 비롯한 참석자 전원이 기립박수를 치는 장면이 일본국영NHK TV방송에 생중계로 보도되었다.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았던 한국의 대통령이 군사쿠데타에 성공하고 자신의 성공이 만주군관학교 일본인교장 때문이라고 무릎을 꿇고 술을 따랐다. 는 사실 자체가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치욕스러운 역사다.

 

 

만주군관학교 나구모 신이치로교장은 박정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카키 마사오생도(박정희)는 태생은 조선인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대한 충성심은 일본인보다 훨씬 더 일본인다웠다."고 박정희를 평가했다.

 

이날저녁 만찬회에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시절 일본군장교들과 동기생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박정희는 유창한 일본말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근대화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 있었던 일본군국주의극우세력들 조차도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박정희가 존경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즐거워했다.

 

 

박정희는 자신이 일본육사출신이라는 걸 내세우면서 "강한군대를 만드는 데에는 일본식교육이 가장 좋다"며 일본군국주의 정신을 찬양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일본극우세력들조차도 기쁘면서도 민망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과거 청와대에서 술에 취하면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 군가를 부르고 일본천왕의 ‘교육헌장’을 줄줄 암송했던 뼛속까지 일본군국주친일분자 옜다.


중앙일보1991.12.14자 보도에 의하면 강창성 당시보안사령관이 “박정희가 1971. 10유신계엄령 선포 한 달 전에 청와대로 불러서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장교복장을 하고.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으로 말채찍을 들고 있었다고 증언하면서.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면서 과거 만주군관학교시절을 회상했다고 한다.

 

 

박정희가 대통령취임식 때 일본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 가 참석했다. 그때 이 사람이 일본에서 말하기를 "박정희와 나는 부자지간일 정도로 친한 사이다. 라고 말하면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일은 무엇보다도 즐겁다." 라고 말해 큰 파장을 일으키면서 한국인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오노 발언은 일본 왕에게 혈서를 써서 충성을 맹세했던 박정희의 모습을 우습게 보는 태도였다. 박정희정권은 오노 발언은 외교상 매우잘못된 것이라고 강력하게 항의를 했어야 하는데 일본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었고 한국정부에서 항의한번 못하고 방관만 하는 박정희정권에 대해 일반국민들은 물론 대학생들이 굴욕적인 저자세라고 강한 반발을 했다.

 

오노 반보쿠의 이 발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오히라 일본 외상은 “나도 친한 한국고관들을 '김군, 이군, 박군. 이라고 불렀다.” 며 맞장구를 쳤다. '네가 내 자식이다.' 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이보다 더 큰 모욕이 없다. 박정희가 갖고 있는 일본에 대한 사고방식은 일반국민들이나, 지식인들이 가졌던 인식차이 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굴욕적인 저자세였다.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에게 "선배님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있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리나라를 키워주십시오." 라는 말까지 했다. 박정희는 아베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조선침략의 원흉인 A급 전쟁범죄자들에게 훈장까지 수여했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북한의 경제규모가 남한과 비교해 2배 이상 발전된 현실을 극복하기위해 미국의 남한정책은 북한공산주의와에 대결에서 이겨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매카나기 대사는 남한의 경제발전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엄청난 사고를 쳤다.

 

군사쿠데타로 침체된 경제 때문에 정권유지가 어려워질 정도로 재정적자는 물론이고 인플레이션이 위험수위에 올라가자 박정희는 화폐단위를 1/10로 평가 절하하는 최악의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화폐개혁은 한국전체가 대혼란에 빠져다. 박정희는 '화폐개혁'을 통해 부정축재자들의 검은돈과 중국인들은 은행을 이용하지 않고 집에다 현금을 다발로 모아 놨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화폐개혁을 단행하자 이런 지하자금은 별로 회수되지 않고㊵돈의 유통이 멈춰 경제시스템이 마비되어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가져왔다.

 

미국은 박정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한 짖을 저질렀다고 사무엘 버거 주한미국대사는 박정희의'무계획'적인 '화폐개혁'에 불같이 화를 냈다. 화폐개혁을 단행한 박정희의 단순한 생각은 엄청난 경제혼란과 함께 전체공장에 절반이 가동을 멈추면서 한국경제가 수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박정희는 최대위기를 맞이했고. 미국도 박정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국정부예산의 절반을 미국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박정희는 예금봉쇄를 해제하지 않으면 9개월 동안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압력에 굴복해 재정적자를 막겠다고 시작한 박정희의 '화폐개혁'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는 미국의 힘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으면서 미국이 동의해주지 않으면 어떠한 경제정책도 우리 스스로자주적으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이때 미국은 비밀리에 종합기계제작소 같은 대규모산업화전략을 포기하라는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한국에 전달했다.

 

 

이 같은 조치에 박정희가 거센 반발을 하자 버거 대사가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협박을 하자 박정희가 태도를 바꾸었다. 미국은 박정희에게 미국정책과 통치의 기본 틀을 가르쳤고. 버거 미국대사는 박정희를 잘 교육시켜 미국의 대리인으로 미국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하는 꼭두각시노릇을 했었다. 장기판에 졸로 본 것이다.

 

 

미국의 경제지배 하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박정희는 미국이 제시한 정책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미국의 채찍과 당근정책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가장 큰 목표는 동북아의 한미일 군사방위전략을 구축하기위해 한국과 일본 간의 대일청구권배상문제해결을 위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박정희에게 강요했었다.

 

 

일본은 한일회담을 통해 한국을 또다시 경제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요시다 일본총리는 이토 히로부미의 길을 따라 또다시 조선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고 공식선언한바 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자 일본재벌들의 한국진출이 봇물 터지듯이 밀려왔다. 미쓰이 미쓰비시 토요다 등. 일본의 대기업들은 한국전쟁이후 10년 만에 얻은 절호의 기회라며 흥분했었다.

 

 

일본의 자본진출과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환경오염이심각한 공해산업을 한국에 떠넘기면서 한국을 일본의 하청 기지로 만들었다. 1970년대 일본은 카드뮴 중독의 ⑥'이타이이타이병과 '미나마타병'으로 심각한 공해문제가 불거지면서 대기오염방지법이 만들어진 이후 수많은 공해산업이 한국으로 이전되었다.

 

 

그 중에서도 ‘원진레이온’으로 잘 알려진 석면공장은 사상 최악의 공해산업이다. ‘죽음의 물질’로 알려진 이황화탄소인 유리섬유 석면공장이 한국으로 옮겨왔다. 석면은 세계보건기구가 규정한 일급 발암물질로 악성폐암 같은 생명에 치명적인 물질이다. 이황화탄소는 2차대전당시 독일군이 유대인 학살에 사용한 독가스의 재료로 사용할 만큼 독성이 강한 물질이다.

 

 

1970년대 초 박정희의 강요에 의해 벌어진 새마을운동당시 농촌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석면으로 만든 슬레이트지붕을 올렸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당시 농어촌의 주택 10채 중 8채가 석면으로 만든 슬레이트지붕을 올렸다. 슬레이트지붕의 재료를 전국에 독점 공급해 벽산그룹재벌이 탄생했다.

 

 

벽산그룹창업자 김인득의 아들 김희용은 박정희의 셋째 형인 박상희의 둘째딸 박설자와 결혼하여 정경유착으로 벽산재벌이 탄생했다. 박상희의 첫째 딸인 박영옥은 김종필부인으로 박근혜와 김종필은 사촌 형부가 된다.

 

 

이와 같이 일본은 한일회담을 통해 공해산업을 한국에 떠넘긴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경제를 일본에 의존적인 산업구조로 만들어 대일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쌓여 한국경제를 일본에 경제식민지로 빠져들어 가는 구조로 만들었다. 한국의 기계부품 중에 85%를 일본에서 수입했다. 일본의 설비와 원자재로 상품을 만들어서 여기서 벌어드린 돈으로 또다시 일본의 값비싼 고급기계부품인 원자재를 수입해서 껍데기만 조립하는 노동집약적인 무한 반복 시스템을 확고하게 정착시켜 우리나라의 대일 무역적자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 옜다.

 

 

1966년에서 1986년까지 20년간 일본과의 무역거래에서 약 320억 달러의 무역 적자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해외에서 돈을 벌어 일본을 먹여 살리는 구조 옜다. 한국경제는 대일 무역적자가 계속 늘어나면서 오늘날까지 대일무역관계가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미국은 비밀리에 종합기계제작소 같은 대규모산업화전략을 포기하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했었다. 이것은 한일회담을 앞두고 한국이 구조적으로 일본경제의 예속될 수밖에 없도록 미국이 공작을 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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