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의열단 박재혁, 부산경찰서장을 폭살

<항일의 불꽃>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조선 의열단

서울의소리 | 입력 : 2018/05/10 [14:03]

의열단이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의열투쟁을 택한 것은, 적은 인력과 비용으로 적을 타격하고 큰 손실을 입힐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안중근ㆍ이봉창ㆍ윤봉길 등의 의거는 대표적인 의열투쟁의 사례이다. 국치 이후 정규군은 물론 의병도 조직이 어려운 처지에서 의열투쟁은 최선의 수단이었다.

의열단은 어렵게 입수하여 밀양으로 보낸 폭탄을 압수하고 여러 단원들을 구속한 것이 부산경찰서라는 것을 알고, 이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김원봉은 1920년 8월 부산출신인 단원 박재혁(朴載赫)을 상하이로 오게 하였다. 싱가포르에 머물던 그는 지체없이 의열단 본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난 박재혁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업을 계속하여 공립부산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의협심이 강한 그는 재학 시절에 최천택 등 학우 16명과 구세단(救世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매월 등사판 잡지를 발간하여 경남일대의 의식 있는 청년들에게 보내었다. 이렇게 동지를 규합하던 중 일경에 조직이 포착되어 주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박재혁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이 지역 청년들과 은밀히 접촉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경북 왜관에서 친척이 경영하는 곡물무역상에 취직하였다.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1917년 6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듬해 잠시 귀국했다가 싱가포르에 있는 남양무역회사에 다시 취업하였다. 그리고 1920년 4월 상하이에서 김원봉을 만나 애국열변을 나누고 의열단에 가입, 조국해방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기로 다짐한다.

 

백산상회 1914년 부산 중구 동광동에 설립한 백산상회. 백산상회는 독립운동 자금 조달처이자 국내외 독립운동 기지였다. ⓒ 독립기념관


박재혁이 싱가포르에 머물고 있을 때 김원봉의 만나자는 전보를 받았다. 의열단의 공약 10조 7항에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박재혁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약산은 상해에 온 그에게 동지들의 복수를 위해 곧 부산으로 출발할 것을 명하였다.

“지금 곧 부산으로 가서 부산경찰서장을 죽이고 오시오.” 

그러나 부산경찰서장에 대한 그의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는 그냥 서장을 죽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약산은 한마디 더 덧붙여 말했다.

“죽이되 그냥 죽일 것이 아니라 누구 손에 누구에 의해 무슨 까닭으로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깨닫도록 단단히 그의 죄를 밝히도록 합시다.”

그러나 훗날 약산은 자기가 한 이 한마디가 혹 살아 돌아올 수도 있었을 동지를 현장에서 죽게 했노라고, 8ㆍ15 후 고국에 돌아온 후에도 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슬픔에 잠기곤 했다. (주석 3)

박재혁은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1개, 군자금 300원, 여비 50원을 수령하고 일본을 거쳐 9월 7일경 부산으로 들어왔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가 고서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듣고 시내 고서점을 돌아 고서를 수집하였다. 

박재혁은 9월 14일 아침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변장하고 보따리에 고서를 잔뜩 싸 들고 부산경찰서장의 면담을 신청하였다. 하시모토는 의심없이 면담을 허락하고, 두 사람은 서장실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리고 고서적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하시모토가 이것저것 고서적을 뒤적이며 구경하는 사이 박재혁은 의열단의 전단(傳單)을 내보이며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 한다.”고 유창한 일본말로 꾸짖고 그를 향해 준비한 폭탄을 던졌다. 

혼비백산한 하시모토는 미쳐 피하지도 못한 채 박재혁의 폭탄 파편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고, 병원으로 이송 도중에 숨을 거뒀다. 이 폭탄으로 부산경찰서가 대파되고 일경 2명도 중상을 입었다. 의열단의 거사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의거의 하나에 속한다. 

폭탄 파편으로 우측 무릎뼈에 중상을 입은 박재혁 의사는 현장에 달려온 일경에 피체되었다. 부산부립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경찰서로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상한 다리를 끌고서 재판을 받을 때에 당당하게 진술하여 검사와 법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1920년 11월 2일 부산지방법원은 사형을 선고하고, 이듬해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은 무기형,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이 사형을 선고하였다. 사형이 확정된 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박 의사는 거사 당시의 부상과 취조 과정의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일체의 식음을 거부, 단식으로 일관하였다. 

무도한 일제의 형률에 따라 죽느니보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면회 온 친구에게 “내 뜻을 모두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토로하고, 단식을 중단하라는 친구에게 “왜놈 손에 사형당하는 것이 싫다”라고 결기를 보였다. 일제 경찰은 억지로 입을 열어 음식을 투입시키려 했으나 굳게 담은 입을 끝내 열지 못하였다.

박 의사는 물 한 잔, 밥 한 톨을 먹지 않고 단식 9일 만인 1921년 5월 27일 대구감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27세의 청청한 나이였다. 일제는 부산진 좌천동 공동묘지에서 치러진 장례도 엄격히 통제하여 가족 외에 친구들의 참석을 금지시키는 야만성을 보였다.

박 의사가 생전에 즐겨했던 격언에서 그의 인격을 살피게 한다. 몇 대목을 소개한다.

大丈夫義氣相許 小嬚不足介
대장부 의기는 서로 믿음에 있으니, 작은 거리낌도 끼어들 수 없다. 

一葉落而 知天下寒
잎새가 하나 지니 천하가 추워짐을 알겠다.

世間好物堅牢 彩雲易散琉璃碎
세상인심은 굳고 단단함을 좋아하나, 색깔구름은 쉬 흩어지고 유리는 쉬 부서진다. 


주석
3> 송건호, 앞의 책, 52쪽.
4> 앞의 책, 56~57쪽.

 

출처 : 김상웅의 인물열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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