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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김종필 다시 '응징'한다.

'제 2의 이완용'이라 불러도 모자람 없을 민족반역행위자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8/06/23 [12:56]

죽은 김종필 다시 '응징'한다.

'제 2의 이완용'이라 불러도 모자람 없을 민족반역행위자

서울의소리 | 입력 : 2018/06/23 [12:56]

방금 김종필(金鍾泌)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무려 92년하고도 5개월을 살았다. 정말 오래 살았다. 언론에서는 좋은 보도만을 많이 내고 있는데 불쾌하다. 김종필의 죽음에 대해 절대 동정도 아쉬움도 있어서는 안된다. 그를 애도한다는 것은 그에 의해 희생된 수 많은 이들에 대한 모욕이다. 

 

김종필은 김대중·김영삼과 함께 이른바 '3김'으로 불리며 대한민국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죽음에 대해 수구·보수 정치권에서는 추모와 애도의 뜻을 담은 입장을 내고, 주요 언론들은 저마다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기사를 내놓고 있다.

김종필은 이른바 '3김'의 한 명으로서 일반적으로 정치계의 거목(巨木) 취급을 받으며, 일각에서는 더 나아가 '존경할만한 인물'로까지 대우하기도 한다. 특히 수구·보수 정치권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김종필이 국민적 존경을 받는 김대중·김영삼과 함께 묶일 수 있던 것은 수십 년간 이어진 지역 분할 정치에서 충청권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지, 그가 후대에 기릴만한 어떤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종필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실세로서 적극적으로 부역하며 호사를 누렸다. 김대중은 정치를 시작하고 서거할 때까지 독재와 냉전 집단에 맞서며 민주·개혁세력의 지주로서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했고, 김영삼은 비록 '3당 야합'과 IMF 사태로 빛이 바랬지만 박정희·전두환 독재에 맞서 싸웠다. 김종필은 박정희 독재의 핵심이었음은 물론, 그 이후에도 언제나 2인자로서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며 지역주의 강화에 크게 기여한 자로서, 서슬퍼런 군부독재 하에서 고난을 피하지 않은 김대중·김영삼과 함께 묶는 것은 옳지 않다.

김종필을 흔히 '박정희의 2인자'라고 하는데, 그는 단순한 2인자 역할 이상을 한 자이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그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기획하며 오랜 군부독재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김종필은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후 중앙정보부(중정)를 만들어 그 수장을 맡았다. 중정은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사회 각분야 요인들과 학생들을 비롯,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중정에서 취조를 받다가 모진 고문에 목숨을 잃거나 반병신이 되어도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김종필은 우리나라에 정보기관을 이용한 정치공작을 들여와 본격적으로 활용한 자이다. 그가 만든 중정은 박정희 권력 유지를 위한 온갖 불법 정치공작, 영구집권을 위한 3선 개헌, 유신정권의 거수기인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 선출 등을 총괄 주도하는등 독재정권의 충실한 손발 노릇을 했다. 중정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와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이어지며 수십 년간 불법 정치공작을 본업으로 하였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국정원의 정치공작도 김종필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김종필은 민주공화당(공화당)을 창당하여 의장으로 있으며 정치판을 주무르고, 국무총리를 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도 휘둘렀다. 김종필이 박정희 독재정권 치하에서 중앙정보부장, 민주공화당 의장, 국무총리 등 요직에서 나라를 쥐락펴락하는동안 국민들은 독재에 시달리면서 짓밟히고 갖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게다가 김종필은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잇따라 협력하며 박정희 독재 부역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았으며, 중정의 온갖 만행에 대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김종필은 우리나라가 36년간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면서 겪었던 온갖 피해에 대한 보상 청구권을 푼돈에 팔아넘기고 그 돈을 정권의 필요 충족에 써버리기도 했다. 그가 적극 추진한 1965년 한일협정은 지금도 일본이 종군 위안부 문제나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한 해결을 거부하는 근거로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지금 되돌아보면, 1965년 한일협정은 나라를 팔아먹은 것과 같다. 김종필은 후일 이에 대해 "제 2의 이완용 소리를 듣더라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는데, 그의 말대로 '제 2의 이완용'이라 불러도 모자람 없을 민족반역행위이다. 김종필은 이에 대해서도 사과하지 않았다.

생을 마친 후에 평가할만한 공과가 뚜렷한 많은 거물 정치인들과 달리, 언제나 권력만을 좇았던 김종필에게 공은 없다. 악인(惡人)에 불과한 그를 굳이 거목에 빗댄다면 썩은 거목일 뿐이다. 세상을 떠났다고 하여 악인을 미화하고 포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김종필의 죽음은 그가 생전에 저질렀던 많은 악행들과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후유증을 남기고 있는지 되돌아 보고, 이를 극복하고 해결하기 위한 논의의 시작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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