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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아서...만주ㆍ연해주에 맺힌 피와 눈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잘못 된 역사 바로 잡아야

정현숙 | 기사입력 2018/11/08 [15:38]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아서...만주ㆍ연해주에 맺힌 피와 눈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잘못 된 역사 바로 잡아야

정현숙 | 입력 : 2018/11/08 [15:38]

윤동주 생가 안내문엔 '中 조선족 시인' 적혀.. 中 역사로 왜곡

한때 1만여 韓人 살던 연해주 '신한촌' 독립운동史서 잊을 수 없는 곳

연해주에 자리잡은 韓人 “후손들 우리 말·글·역사 몰라기회의 땅에 관심 기울여주길”

 

  안중근 의사의 초상화에서 확대 시킨 무명지가 잘린 왼손. 뉴시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사에 있어 만주ㆍ연해주는 중요한 지역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무덤, 발해의 상경용천부 등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고구려와 발해의 찬란했던 역사가 있는 곳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만주ㆍ연해주는 더더욱 중요하다.

 

1920년~30년대 무장 항일투쟁의 핵심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수이푼 강가에 쓸쓸히 서있는 이상설 유허비,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맹세했던 안중근의 단지동행비와 이회영의 순국장소인 뤼순 감옥, 민족시인 윤동주 생가 등 민족의 아픔이 절절히 녹아있는 곳이 만주와 연해주이다.

 

100년 사이 한반도는 태평양전쟁의 광풍에 휘말렸고,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자마자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한반도에서 3ㆍ1 운동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은 여전히 뚜렷하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또 다른 무대였던 연해주와 만주에선 한민족의 독립운동 흔적이 희미해져만 간다. 지난달 22~27일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의 주최로 각 언론사에서 찾은 연해주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지에는 아직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이 남아 있지만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남겨두고 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기념탑 철제 울타리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연합뉴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 등 해외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그동안 만주 연해주의 독립현장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얼빈에 정율성 기념관이 건립됐고, 하얼빈 역사에는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도 들어섰다. 731부대는 '죄증진열관'으로 새단장을 했다.

 

용정의 대성학교 앞 윤동주 시비 왼쪽에는 거대한 윤동주 동상이 들어섰으며, 명동촌은 윤동주 기념관과 기념시비로 가득찼다. 송몽규의 집도 명동학교도 다시 단장됐다. 찾아가기 어려웠던 윤동주 시인의 무덤도 찾아볼 수 있었다. 

 

우당 이회영의 순국지가 체포 장소인 다렌의 수상경찰서가 아닌 뤼순 감옥임도 밝혀졌다. 가장 큰 변화는 고구려ㆍ발해 역사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중국의 역사로 둔갑돼 있었던 점이다.

 

집안의 고구려 유적은 중국식으로 꽃단장을 했고, 새로 지은 집안 박물관 제1전시실의 주제는 '한당고국'이었다. 즉 한나라와 당나라 시기의 옛 국가라는 뜻이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안내판에는 '발해는 중국 당나라때 속말말갈족이 건국한 나라'라고 쓰여 있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의 옛집이 있다.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러시아인 소유였던 곳을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사들여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연해주 옛집. 최재형은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천대 받았지만, 마지막까지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형은 연해주에서 거부가 된 후 조선인 학교를 설립하고 러시아 한인 신문 대동공보를 재발간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또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뒤에서 지원하기도 했으며 항일단체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무기를 공급했다.

 

생가 안에 들어서면 별다른 안내 문구나 사료도 없이 텅 빈 공간이다. 한인들의 지도자였던 최재형의 지난날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최재형 옛집은 리모델링 공사 막바지 단계로 아직 유품과 사료는 전시되지 않았지만, 독립지사들의 흔적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본군은 1920년 4월 4일 밤 연해주 일대 고려인 밀집 지역을 습격했다. 이른바 '4월참변'이다. 최재형은 집에서 멀지 않은 왕바실재 언덕에서 체포돼 이튿날 처형당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비포장길을 걸어 올라가 처형 장소로 알려진 언덕에 닿았다. 기념비나 안내판조차 없었다.

 

우수리스크에서 차로 3시간을 남서쪽으로 가면 크라스키노에 위치한 안중근 단지동맹비를 만날 수 있다. 안중근은 최재형이 총장을 맡은 동의회 소속으로 1909년 동지 11명과 함께 크라스키노에서 손가락을 자르며 독립운동에 목숨 걸 것을 맹약했다. 광야에 세워진 검은 비석 상단에는 무명지가 잘린 왼손 모양이 새겨져 있다.

 

최재형은 안중근과도 인연이 깊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뒤에도 최재형이 있었다. 1908년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구국운동단체 동의회를 결성한다. 최재형이 총장을 맡았으며, 안중근도 참여했다.

 

안중근은 이듬해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넷째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혈서를 쓰며 '단지동맹'을 한다. 이들은 최재형 지원으로 훈련을 받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사격 연습을 한 곳도 최재형 집이다. 최재형은 변호사를 선임해 안중근을 살리려 했으나 재판이 러시아에서 일본 법정으로 넘어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수리스크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 거리의 크라스키노시 외곽에 단지동맹 기념비가 있다. 인근 해변 습지대에 발해성터가 남아있는 크라스키노 지역은 동의회가 훈련하고 안중근이 단지동맹을 맺은 곳이다.

 

(크라스키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두번의 이전을 거쳐 조성된 안중근 단지동맹비.

                     두번의 이전을 거쳐 조성된 안중근 단지동맹비.  

 

높이 4m 정도 큰 비석에는 '1909년 3월 5일경 12인이 모이다', 높이 1m 정도 작은 비석에는 '2001년 8월 4일 102년이 지난 오늘 12인을 기억하다'라고 쓰여 있다. 파란만장한 역사만큼 단지동맹 기념비도 여러 차례 장소를 옮겨 이곳에 왔다.

 

애초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처음으로 기념비를 세웠으나 물에 잠기고 현지인들이 훼손하는 사례가 잦았다.

이후 비석을 옮긴 지역은 국경지대로 편입돼 러시아 보안당국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게 돼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러시아 극동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최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인기 여행지로 떠올랐다. 비행기를 타고 2시간이면 닿는 곳에서 이국적인 유럽 정취와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어서다.

 

모스크바에서부터 이어지는 총 길이 9천288㎞ 시베리아 횡단철도 종점인 이곳은 한민족 역사와도 관련이 깊은 땅이다. 연해주는 3.1운동 이전부터 수많은 의병과 독립지사들이 망명해 항일투쟁을 펼친 해외 독립운동의 요람이다.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1910년대 연해주 항일투쟁의 구심점은 당시 가장 큰 한인 주거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라게르산 비탈에 자리 잡은 신한촌(新韓村)이었다.

 

기념비 아래 비탈에 자리 잡았던 신한촌은 한때 1만여 명의 한인과 독립지사로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러시아인들의 아파트와 상가들이 들어서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강제 이주 80년의 공백이 흔적을 지웠다.

 

한인들이 1874년 처음 마을을 이뤘던 곳은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 서남쪽 아무르만 주변인 개척리(開拓里)였지만, 러시아 당국은 1911년 이 마을을 강제로 더 변두리인 지금의 신한촌으로 옮기도록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기념탑 철제 울타리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기념탑 철제 울타리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연합뉴스

 

기념탑은 각각 대한민국, 북한, 재외동포를 상징하는 높이 3.5m가량의 대리석 기둥 세 개와 조선 팔도를 의미하는 작은 돌 8개로 조성됐다. 1999년 3.1운동 60주년을 기념해 해외한민족연구소가 세운 기념탑은 철제 울타리로 주변이 둘려 있다.

 

자꾸 훼손되는 탑을 보존하기 위해 울타리를 두르고, 평소에는 자물쇠까지 채워 출입을 막고 있다. 철제 울타리에 묶인 태극기와 천띠 몇 개가 바람이 나부꼈다.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신한촌 주변 거리 이름은 예전에는 '서울 거리'라는 뜻의 '서울스카야'였다. 지금은 러시아 영웅 이름을 딴 '하바로프스카야'다.

 

연해주는 러시아 연방 시베리아 동해의 연안에 있는 지역 이름으로 대표적인 도시는 블라디보스토크다. 냉전시대에 고국조차 외면했던 한인 후예들은 작은 바람이 있다. 한인 동포들은 "일제강점기에 한글을 잃고, 스탈린 시대에 우리 언어와 역사 교육을 못하게 하면서 후예들이 우리 말과 글, 역사를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남북한이 잘돼야 우리도 잘산다”며, 남북 철도 동해선이 연결되면 연해주는 부산에서 유럽까지 이어주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출발지로, 다시 기회의 땅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더불어 연해주 독립운동 거점 역할을 한 도시가 우수리스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 약 100㎞ 거리인 이 도시는 과거 발해의 5경 15부 중 하나인 솔빈부가 있던 곳으로, 헤이그 특사이자 대한광복군 정부 대통령 이상설이 활동한 무대였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살아가는 한 고려인이 우수리스크 수이푼강 인근에 세워진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보며 깊은 회한에 잠겨 있다. 서울경제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한 한을 품고 눈을 감은 그의 유해는 재가 돼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에 뿌려졌다. 수이푼 강변에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세운 이상설 유허비가 덩그러니 서 있다. 유허비 앞으로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광활한 초원 너머로 옛 발해 산성이 보였다. 

 

헤이그 밀사 건으로 일제는 피고인이 없는 궐석 재판을 열어 이상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귀국을 단념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사형수 이상설’은 연해주 일대의 의병을 모아 13도 의군을 편성했다. 한일병합반대운동도 벌였다.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선임됐다. 그러나 1917년 망명지 연해주에서 병에 걸려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없지만 이상설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진 곳이 수이푼 강 기슭이다. 그의 유언은 이랬다.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내 유품, 내 유고는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렇게 해서 그의 유해는 수이푼 강물에 뿌려졌다. 북방의 바람은 차가웠다. 강물은 지금도 흘렀다. 이상설이 잠든 곳은 이국의 땅이 아니었다. 우리 가슴 속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역사의 한가운데서 우국충정이라는 진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상설은 광복을 보지 못함을 애통해하며 자신의 유해를 수이푼 강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독립운동가들의 고향인 중국 룽징시 명동촌은 ‘윤동주 생가’라고 적힌 큰 돌이 외지인을 맞는다. 마을은 한적한데, 윤동주를 기념하는 비석들과 안내 문구들이 중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듯 요란하다.

 

윤동주의 생가는 명동학교 바로 옆에 있다. 집은 1932년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면서 팔렸고,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현재 있는 집은 룽징시 인민정부가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에는 ‘중국 조선족 시인 윤동주의 생가’라 적혀 있다.

 

다른 만주 유적지처럼, 민족성을 지키고자 했던 윤동주의 삶도 중국의 역사로 왜곡돼 있다. 만주의 모든 역사를 중국화하려는 동북공정의 흔적이다. 곳곳마다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을 중국의 역사로 은근히 묘사한 안내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

 

한글로 된 안내문은 독립운동가의 활동 내용만 간략히 서술돼 있을 뿐, 한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윤동주 등이 다닌 명동학교는 새롭게 지었다. 전시관으로 꾸며 윤동주와 문익환 등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었다. 깔끔하지만 옛 모습을 느끼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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