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과 노예해방, 한국 정치인의 멘토-롤 모델 링컨

'경청'의 마인드, '타협'의 정신, '통일조국'의 신념 - 미국연방 확립

권혁시 칼럼 | 입력 : 2019/01/01 [23:39]

'통일조국'의 신념, '경청·타협'의 정신, '변화관리'의 지혜와 용기를 배워라 

 

새해 2019년의 첫날, 1월 1일은 미국의 '노예해방선언'(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156주년이다. 신년 벽두에 이를 거론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미국은 물론 세계적인 위대한 정치지도자, 제16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정신과 행적을 우리나라의 특히, 정치인·관료들이 본받아 실천함으로써 남북의 '평화통일'과 '협치'(거버넌스, 숙의정치)의 실현을 간절히 바라서이다.

 

 

링컨은 보통사람 이상으로 대단히 인간적이었지만, 일반인들과 확연히 다른 특질은 탁월한 '경청'의 마인드와 '타협'의 정신이며, 그것을 견지하여 어김없이 실천하는 용기와 발상의 전환에 의한 '변화관리'(change management)의 지혜와 능력이다. 이를 통하여 창조와 혁신을 이루어낸 그의 사고방식(정신·신념)과 행동양식(태도·실천)을 한국의 위정자들이 롤 모델 삼아야 하며, 더욱 본받을 점은 링컨 특유의 정치적 신념이다. 그것은 미연방의 분열을 심히 우려하고 극력 반대하여 '연방통일' 정책을 고수한 끝에 분열과 대립, 갈등과 반목의 지난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분열된 집은 일어설 수 없다. A devided house can not stand!"

 

이에 부언하거니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전향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경제발전, 남북·북미 관계진작, 완전 비핵화를 재천명하였다. 이는 한반도의 '평화통일·민족번영', 나아가서 세계의 역사를 다시 쓰는 '세계평화·인류공영'을 향한 대장정을 언명한 것이다. 이 같은 의미 맥락에서 특히, 수치스럽기 이를 데 없는 '세계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가 깊이 성찰하여 반드시 유념해야 할 바는, 링컨의 국가관·국정철학의 최고목표이며 최상의 가치로써 불변하는 미국연방 수호, '통일조국'의 구현인 것이다.

 

그런데, '민주시민혁명'을 성공적으로 완결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띤 정부가 안타깝게도 정치공학적 이해득실에 연연하여 겉으로는 '경청'하는 듯 하지만, 실은 마이동풍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처럼 리더십의 기본인 경청, 곧 여론수렴 정치가 미급한 탓에 경제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최근에도 낙점인사, 블랙리스트, 민간인 불법사찰, 언론통제 등등의 의혹들이 연이어 불거져 적이 심상치 않다는 게 세간의 중론이다(물론, 야당을 비롯한 수구 적폐 무리의 적반하장 식 비난도 적잖다). 그러므로 링컨처럼, 나라와 국민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용감하고 슬기롭게 이끌고 나갈 '영웅적 지도자'의 역할이 절실한 지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찰컨대, 링컨의 정치역정, 그 역할의 분수령은 남북전쟁과 노예제 폐지이며, 미국의 남북전쟁은 사회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된 내란이었다. 아메라카 남부는 영국 산업혁명의 주력인 면화의 수요를 흑인 노예의 노동력에 의한 생산, 공급으로 충당하였다. 그런 까닭에 노예제의 유지와 영국과의 자유무역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공업이 발달한 북부는 노동력이 토지·지주에 종속되는 노예제에 대한 반발에 컷고, 아울러 영국의 자유무역에 대응하여 관세를 보다 강화하는 보호무역 정책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로 인하여 아메리카 남부와 북부의 갈등이 급격히 고조되어 대립국면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점에 북부 출신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남부 11개 주가 북부 출신 대통령 당선에 반발하여 '아메리카연합국'을 건립하면서 내전이 개시되었다. 전쟁상황이 개전 초기에는 남부가 유리하게 전개되었나, 링컨의 '노예해방선언'(The Emancipation Proclamation)이 내외 여론의 지지를 받으면서 게티즈버그 전투 직후, 전세가 역전되어 북군이 단연 우세게 전황이 급변하였다.

 

그리고 1864년 11월 8일, 사상 초유로 전쟁 중에 선거가 실시되어 링컨이 대통령에 재선된다(전시 비상사태에서는 선거실시를 유보할 수 있으나, 위기에 처할수록 '민주주의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링컨의 지론과, 그 주장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한 것이다). 링컨 대통령의 제2기 임기 개시 직후인 1865년 4월 9일, 지리멸렬하던 남군이 마침내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른다(이 '남북전쟁'에서 패배로 전락하는 남부의 암울한 상황은 마가렛 미첼이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다).

 

이렇게 전쟁의 참화를 불러온 4년간의 결코 짧지 않았던 미국의 내전은 남부(세력)의 항복으로 종식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주일 후인 4월 15일, 이 도도창창(滔滔蒼蒼)한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 바로 잡던 용감하고 위대한 링컨이 포드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중 남부 출신 배우 존 부스의 총격에 의해 암살 당한다. 이날이 마침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수난절(성 금요일)이어서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도인) 미국인들은 이를 연상·상기하며, 자신의 고통과 희생을 통해 '미국연방'을 회생(부활)시킨 링컨을 추앙하며 추모한다.

 

다시 말하면, 아메라카합중국(미국,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분열될 수밖에 없는 파국의 일보 직전, 그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기에 국가 최고지도자로 등장한 뉴페이스가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1809년 2월 12일, 켄터기주의 변방 하딘의 통나무집에서 가난한 개척민,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비록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기질을 백분발휘하여 무사독학으로 지식을 쌓고 지혜를 길러 '특립독행'(特立獨行)의 자기완성을 성취하였다

 

'경청'의 마인드, '타협'의 정신, '통일조국'의 신념 - 미국연방 확립
'민주주의 원칙' 준수 - 인간존엄성 수호, 자유·평등 실현의 노예해방(선언)

 

 

그러한 링컨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경청'의 마인드, '타협'의 정신을 습득했던, 크게 소리 내어 읽으며 그것을 자신이 다시 듣는 독서법과 학습방식, 그 습관이 대단히 특별하고, 그래서 누구이든 이를 본받아야 할 줄 안다. 여론을 중시해야 할 정치인들은 더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나는 내용을 두 가지의 감각으로 헤아린다. 큰 소리로 읽으면서 읽는 것을 듣는 동시에 보는 것이다. (중략) 그러면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하더라도 더 잘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이 같은 방법의 독서를 체화한 링컨의 생각(정신·사고방식)과 태도(실천·행동양식)는 연방 하원의원으로서 반대파의 선각자 제퍼슨(링컨이 가장 존경해 마지 않았던 당대의 정치인)과의 관계, 그리고 노예제도에 관한 입장(견해)에서 '타협정신'으로 발출한다(그러한 포용력은 국가 최고책임자로서 인재등용, 곧 탕평인사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링컨은 아메리카 남부지역 출신이었으나, 서부개척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여러 지역을 전전한 후, 인디애나주, 일리노이주에서 청년시절을 보냈다.

 

북부지역인 그곳은 노예제 문제가 심각할 정도의 트러블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흑인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정서는 대단히 적대적이었다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하여 링컨 자신이 사적으로는 개혁운동에 공감하면서도, 공적으로 '노예제 폐지'에 선도적 역할을 자임, 자처하고 나서지는 않았다. 그런데 1854년, 그의 정계복귀 시기에 노예제 이슈가 미국정치의 핵심적인 쟁점으로 대두하였다.

 

그런 와중에 캔자스 네브래스카 법안이 의결됨으로써 전통 있는 2대 정당의 해체와, 공화당 결성의 극히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정치적 상황이 링컨으로 하여금 (그의 전 생애에 있어) 최초로 노예제를 적극 부정하며, 거침없이 비판하는 전환점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으며, 다만 노예제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하는 옹호론자와 폐지론자, 그 양극단을 조정하기 위해 더이상의 노예제 확대를 반대한 것이었다.

 

그가 보다 중요하게, 목적으로 삼은 것은 노예제의 존폐문제가 아니라, 연방의 유지, '통일연방'를 위한 방편이었다. 1858년, 연방 상원의원선거에서 이 같은 그의 투철한 신념, 정책 의지를 힘주어 일갈하였다. "분열된 집은 도저히 흥할 수가 없다. (중략) 결코 연방의 와해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집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오직 바라는 바는 연방이 갈라져서 싸우는 짓을 멈추는 것 뿐이다"

 

그래서, 비록 선거전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스티븐 더글라스와 일곱 차례의 논전(정치 대토론회)을 통해 정치신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일약 거물 정치가로 급부상하며 국가 최고지도자의 거보를 내딛는다. 링컨·더글라스 논쟁 이후 1년이 지난 1859년 10월, (실패로 끝났으나, '노예해방' 계획에 의한) 하아퍼어즈 페리 병기고 습격사건은, 흑인폭동의 전조로 여겨 남부 전역을 흥분과 불안에 빠져들게 하였다. 그토록 격앙된 상태에서 1860년, 미국 제1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고, 공화당 후보 링컨은 민주당이 남북으로 분열되는 천우신조에 의해 신승하였다.

 

이에 반발한 남부지역 최남단의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필두로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였고, 이듬해 2월, 남부동맹(아메리카연합국)을 결성하여 제퍼슨 데이비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기에 이른다. 1861년 3월 4일, 아메리카합중국의 대통령에 취임한 에이브러햄 링컨은 연설에서 연방의 역사가 헌법보다 더 깊은 연유를 강조하면서 (미연방의) 영원한 분리는 있을 수 없다는 당위성을 피력한 후, 남부를 향해 타협에 나설 것을 강하게 어필하였다. 하지만 흥분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부(세력)는 링컨의 간절한 호소를 귓등으로 흘려들었고, 남북전쟁의 전운이 감돌았다.

 

그런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남부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에 위치하여 고립된 북부관할의 섬터 요새에 대한 남부의 귀속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링컨 대통령은 섬터 원정을 포고하였고, 이에 보우리가아드가 이끄는 남군이 섬터에 상륙하여 항복,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부하자 이튿날 4월 11일, 하루만에 요새를 함락시켰으며, '남북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때에 물적자원·공업력(군수물자 공급),인구, 영토 등, 남군은 전력 면에서 절대 열세였다. 그런데도 실전에서는, 미리 전쟁준비를 한 데다가 로버트 리, 조셉 존스턴 등, 명장들의 맹활약으로 오히려 남군의 우세가 역력한 전황이 지속되었다.

 

북군은 1861년 7월, 불런전투에서 대패한데 이어 이듬해 8월, 리 장군이 지휘하는 남군이 북메릴랜드 앤티이텀 공격으로 더욱 수세에 몰렸다. 그 1년 후에 다시 펜실베니아를 공격, 북군은 게티즈버그에서 3일간의 고전 끝에 간신히 북군을 격퇴시켰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이 땅에서 사라지게해서는 안 된다" 링컨이 '민주주의의 원칙'을 설파한 저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은 이 전투가 끝난 넉 달 후, 전몰장병에게 바친 2분여의 짧은 추모사였다.

 

그 후에 동부전선에서는 전투가 소강상태였으나, 서부에서는 그랜트 장군 휘하의 북군이 연전연승하며 미시시피강을 남하하여 1863년 7월, 피츠버그를 점령한 후, 리치먼드,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렇게 남군과 북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1863년 1월 1일, 남북전쟁 발발과 동시에 '통일연방 보위(유지)'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바 있는, 링컨 대통령은 급기야 '노예해방선언'을 공표하였다. 링컨의 특장인 '발상의 대전환'에서 비롯된 결과였지만 남북전쟁과, 그로부터 촉발된 노예해방의 궁극적 목표는 '미국연방 회생, 결속'이었다.

 

노예해방의 공약은 이러한 목적의 부수적인 현안이었지만, 결국에는 링컨의 민주정치와 미국역사의 한 획을 긋는 대사건으로 그 의미가 제고, 확대된다. 그런 노예해방을 주장한 급진파에 동조하는 시민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급진세력의 주장, 즉 전쟁계획은 ①노예해방 즉각실행, ②무장노예의 연방군 가담, ③남부세력 재산몰수,  흑인·빈곤백인에 분배, ④자유농제도 신설 등이다) 그 제안에 찬동하는 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그래서 여론의 동향을 중시하는, 경청의 마인드가 남달랐던 링컨은 이에 대하여 숙고하며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데 골몰한다.

 

그런 가운데, 미국 공화당 창설의 주역이며 링컨의 대통령 선거운동에도 전폭적으로 지원, 협력했던 호리스 그리일리는, 정부의 타협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노예제의 즉시 폐지야말로 북부 2천만 민중의 한결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밝혀 링컨을 향해 '공개질의'를 발표하였다(1862년 8월 뉴욕 트리뷴지, '2천만의 기원'). 이런 논박에 대하여 링컨은, 노예해방을 확약하지는 않았으나, 이 핫이슈에 관하여 분명하며 거의 결정적인 견해를 질의응답으로써 피력하였다,

 

"만일 내가 노예해방을 하지 않고 연방을 구해낼 수 있다면 그리할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만약에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켜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리하고 싶다"

링컨이 이같이 노예제 폐지 입장을 보다 확고히 정립하기 시작한 이유는 다분히 전술·전략적인 것일 수 있다. 북부로서는 당시의 전황이 리 장군이 지휘하는 남군 정예부대의 메릴랜드 침공으로 수세적 국면이었을뿐 아니라, 남부를 옹호하는 영국이 전쟁을 간섭하려 들 조짐마저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전쟁의 대의명분이 절실히 필요했고, 국민여론 또한 상승작용(시너지효과)을 일으키면서 노예제 폐지는 갈수록 기정사실로 인식되어 갔던 것이다.

 

그처럼 북부의 전쟁목적이 '노예해방'에 있음이 확고부동해짐으로써 북부(세력)의 전의가 상승, 고조되고 영국(정부)의 남부지원 계획은 여지없이 소멸되고 말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남북전쟁은 미합중국의 남북분할 시도를 무력으로 제압하여 '연방통일'과, '노예제도 폐지'를 동시에 성공시키는 역사적인 위업을 실현하였다. 이로써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조지 워싱턴(초대), 토머스 제퍼슨(제3대), 시어도어 루루스벨트(제26대), 프랭클린 루스벨트(제32대) 등을 능가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지도자로 공경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 핵심적 이유는 미국연방, 곧 아메리카합중국을 분열 ㅡ 갈등, 대립, 반목, 사분오열 ㅡ 그 위기에서 내전의 뼈아픈 대가와 고통을 감내하면서 끝내 지켜낸 ㅡ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짓밟는 '노예제'를 사라지게 하고 일치와 번영을 가져온 '미국연방'을 살려 낸, 바로 그것이다. 단언컨대, 링컨 대통령의 최대 업적은 미국연방을 회생시켜 튼실히 '통일조국'을 확립함과 아울러 노예제 폐지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유·평등을 실현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원칙'을 정립한 것이다.

 

그래서 거듭 바라는 바는, 위대한 세계적 정치지도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정신과 행적을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이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다. 링컨의 '경청'의 마인드, '타협'의 정신과, 이를 실천하는 용기와 변화의 관리,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창조와 혁신을 이루어낸 정신(사고방식)과 태도(행동양식)를 위정자들은 반드시 귀감 삼아 실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가발전과 민생안정, 곧 국리민복을 실현하고, 나아가서 남북 평화통일과 민족번영의 위업을 이루는 데 헌신해 주기를 간청, 간구한다.

 

대한글씨검정교육회 권혁시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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