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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애국가, '친일' 넘어 '친나치' 이대로 불러야 할까?

이해영교수, 국가 상징의 숨겨진 치욕.. 친일에 친나치 혐의까지 문제적 인물 ‘안익태 케이스’ 펴내

정현숙 | 기사입력 2019/01/18 [14:30]

안익태 애국가, '친일' 넘어 '친나치' 이대로 불러야 할까?

이해영교수, 국가 상징의 숨겨진 치욕.. 친일에 친나치 혐의까지 문제적 인물 ‘안익태 케이스’ 펴내

정현숙 | 입력 : 2019/01/18 [14:30]

정운현 국무총리 비서실장 "서방 선진국이라면 애국가는 벌써 폐기됐을 것"

1942년 2월3일 열릴 나치 정권의 전쟁 �상자� �족을 돕기 위한 자선 기금 연주회를 앞두고 안익태(오른쪽)� �휘할 <일본 축전곡>에 �해 작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왼쪽)� 상의하는 모습. 촬영 일시� 장소는 알려져 있� 않다. 출처 베를린 연방문서보�소, 삼인 제공

1942년 2월3일 열릴 나치 정권의 전쟁 부상자와 가족을 돕기 위한 자선 기금 연주회를 앞두고 안익태(오른쪽)가 지휘할 <일본 축전곡>에 대해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왼쪽)와 상의하는 모습. 촬영 일시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베를린 연방문서보관소

 

우리나라 국민의 기쁨과 슬픔, 고락을 함께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의 친일 행적을 지적해온 정치학자 이해영 한신대 교수가 안익태의 과거 유럽 활동을 분석한 신간 ‘안익태 케이스’를 최근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안익태가 친일을 넘어 나치 독일의 나팔수까지 친나치”라고 주장했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가 친일파였을 뿐 아니라 친나치 활동을 한 전력까지 드러났다. 이해영 교수가 이런 사실을 밝히자 세간의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정운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17일 페이스북을 통해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행적은 알려진 것이지만 그의 친나치 행적은 매우 놀랍다.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에 대해 이제라도 진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서방 선진국이라면 애국가는 벌써 폐기됐을 것이다."라고 일침했다.

 

이해영 교수가 최근에 펴낸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는 지난 8년 남짓 직접 발굴한 최신 자료들을 종합해 그동안 알려진 안익태의 일본명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만이 아니라 친나치 활동까지 고발하는 문제작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192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1938년 무렵 유럽에 진출한 당대에 드문 서양 음악가였다.

 

안익태는 우리 민족이 일제강점기하 짓밟히고 신음할 때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유럽에 발판을 마련했다. 결혼과 함께 스페인 마요르카섬에 정착, 영주권을 받았는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가 작곡한 '애국가'가 정식국가로 채택됐다.

 

1955년 귀국한 그는 한국 음악계에서 일하다가 1964년 스페인으로 돌아갔으며 1965년에 사망했다. 이후 안익태는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고 국립묘지인 현충원에 묻혔고 2009년에 사망한 스페인 출신의 부인 로리타 안 씨도 같이 합장됐다.

 

2000년대 이후 각종 자료를 통해 안익태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고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기미가요는 일본의 국가(國歌)로서 '천황의 통치시대는 천년 만년 이어지리라...'라는 가사로 일본 왕의 시대가 영원하기를 염원하는 내용이다.

 

2015년 안익태가 1941년 일본 명절에 일왕의 시대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곡인 ‘기미가요’를 피아노로 연주했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찾아낸 이해영 교수는 신간에서 이 글을 쓴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1896∼1969)에 주목한다.

 

에하라는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 하얼빈 부시장을 지낸 뒤 1938년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해 1945년 7월까지 독일에 머물렀다.

저자는 독일의 한국학자 프랑크 호프만이 발굴한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 문건을 통해 에하라의 실체를 설명한다.

 

미 육군이 독일과 일본 전직 정보 장교의 진술을 기록한 해당 문건은 “에하라는 주독 일본 정보기관의 총책이었다. 그는 주폴란드 정보기관과 공동 작전을 수행했다”고 명시했다.

 

참사관이라는 직위는 에하라가 내건 위장된 타이틀이며, 실제로는 그가 일본 정보기관의 독일 총책이었다는 것이 저자 생각이다.

 

이해영 교수 본인이 안익태의 주 활동무대였던 독일에서 유학했고, 클래식 음악과 오디오 애호가이기도 한, 논쟁적 정치학자답게 안익태 문제에 대한 기존 음악계의 학문적 접근보다 주장이 뚜렷하다.

 

'애국�'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 씨� 일본 명절에 기미�요를 연주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공개됐다. 사진� �난 2013년 9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안익태 선생 48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 및 분향하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사진은 지난 2013년 9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안익태 48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 및 분향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2차 대전 2년반 동안 적극 동조한 친나치 행적.. 프랑코가 집권하던 스페인으로 ‘도주

 

안익태도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35년께 미국에서 ‘애국가’를 초연할 때만해도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돕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안익태가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였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지자, 일제는 유럽지역 자국민 소개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대로 귀국하게 되면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오기까지 이룩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안익태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한다. 그 덕분에 안익태는 1941~44년까지 만 2년 반 동안 에하라의 베를린 자택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다.

 

1944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을 비롯해 그는 동맹국(독일·이탈리아 등)과 점령국(프랑스), 우방국(스페인)에서만 30차례의 공연을 지휘한다. 자신이 작곡한 <에텐라쿠>, <만주국 환상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 등도 연주했다.

 

특히 그는 나치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 됐다. 그 회원증에서 그는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도쿄로 속여서 적기도 했다.

 

이 교수는 “안익태는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엔 약한 민족주의 성향마저 탈색되면서 적극적인 친일로 전향했는데, 본래부터 음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출세욕이 강한 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 교수는 안익태가 지휘한 여러 공연이 ‘독-일협회’의 주최와 기획으로 열렸다는 데 주목한다. 독일과 일본의 민간 친교·학술 교류단체였던 독-일협회는 나치의 제정 지원을 받는 당 외곽 조직이자 두 나라의 대외 선전도구 구실을 했다.

 

이런 점들을 종합했을 때, 이 교수는 안익태를 에하라의 ‘특수공작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안익태는 미리 일본의 첩보를 입수한 듯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독일의 우방국이자 파시스트 프랑코가 집권하던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기피 인물’로 지정된 안익태는 파리는 물론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는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이 또한 그의 친나치 활동을 방증한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의 매국 혐의를 추적했다.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에서 찾은 자료도 안익태의 불순한 행적을 드러낸다. 1942년 9월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를 지휘한 것은 친일의 대표 사례다.

 

이 때 연주된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가 애국가다. 일본 정보기관의 유럽 첩보망의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가 안익태의 실질적 후견인이었다는 점도 새롭게 조명됐다. 나치와의 연관성을 입증할 ‘물증’도 찾았다.

 

1943년 조선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독일로부터 발부 받은 제국 음악원 회원증에는 ‘정치적으로 아무 하자 없음’이란 도장이 찍혀 있다. 나치가 자신들과 같은 편이라고 인증한 셈이다.

 

안익태의 애국가를 이대로 둬도 좋은가. 친일을 넘어 친나치 혐의까지 드러낸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를 각종 기념식에서 여전히 불러야 하는가. ‘애국가’ 같은 기본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책은 과거의 고발을 넘어 현재의 우리에게 국가 상징의 숨겨진 치욕의 민낯을 보여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또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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