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러시아 옛집 독립기념관으로 변신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러시아 고택, 정부 지원으로 독립기념관으로 재탄생 하다

정현숙 | 입력 : 2019/03/28 [10:01]

“기업가, 교육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

 

국가보훈처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최재형 선생이 순국하기 전까지 거주한 건물을 전시관으로 조성해 오는 28일(현지시간) 러시아 우수리스크시에서 개관한다고 27일 전했다. 사진은 최재형 선생 기념관 외부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항일 독립운동가 최재형(1860∼1920) 선생의 러시아 옛집이 독립운동기념관으로 조성됐다. 건립 비용 12억원 중 보훈처가 우수리스크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에 지원하는 방식으로 10억원을 보탰다.

 

국가보훈처는 27일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최재형 선생이 순국하기 전까지 거주한 고택을 독립운동기념관으로 만들어 28일 오전 11시(현지시간) 러시아 우수리스크시 현지에서 개관식을 한다고 밝혔다.

 

기념관 규모는 대지 약 640㎡, 연건평 100㎡이다. 개관식에는 피우진 보훈처장, 최재형 선생 후손, 러시아 고려인연합회 회장, 연해주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장,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고려인 동포 등 70여명이 참석한다.

 

전시는 최재형 선생의 삶과 독립운동 공적을 중심으로 구성됐고 입구에는 최재형 선생의 애칭인 ‘페치카’(따뜻한 난로)를 설치했다. 그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따뜻한 대부의 역할을 하면서 페치카로 불렸다. 최재형 선생은 독립을 위해 전재산과 목숨을 바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운동가로 평가된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난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의 자금줄이라고 이 분은 원래 부잣집에서 태어난 분이 아니다. 노비의 아들로서 가족들이 쫓기듯 연해주로 도망쳐서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면서 부를 쌓았고 그 부를 오로지 조국 독립에 바쳤다.


9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해 러시아 군대의 군납 상인으로 거금을 모은 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시베리아 이주 한인을 위해 썼다. 이후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독립운동 후원을 자처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의 물질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이 지역에서 신문을 발간하고 수많은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도 크게 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초대 재무총장으로 추대될 정도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았다. 1920년 4월 연해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한인과 러시아인 240명을 기습적으로 체포하여 무참히 총살해 피살되는 참극을 겪었다. 러일전쟁 후에는 동의회·독립단 등을 조직해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최재형 선생. 국가보훈처

 

선생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연해주 한인 학살 시 목숨을 잃게 됐지만 기업가, 독립운동가, 교육자로서 이 분보다 더 탁월한 분이 있을까? 최재형 선생은 업적에 비해 안 알려졌지만 우리 정부에서 선생의 진정한 애국정신을 고취시키고자 그의 옛집을 지금이라도 독립기념관으로 거듭나게 만들어 무참히 일본군에 살해된 억울한 원혼이나마 위로받게 하여 얼마나 다행인가.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훈격 저평가"

 

정부는 1962년 최재형 선생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지만, 오래도록 국내에선 '잊힌 영웅' 취급을 받았다.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은 국적이 러시아라는 이유 등으로 훈격이 저평가돼 있습니다. 국가가 나서 공훈을 제대로 평가해야 합니다.”

 

문영숙(여·62)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은 27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을 위해 안중근 의사에게 총을 건넨 독립운동의 전설이자, 안 의사가 끝까지 지킨 인물인 최재형 선생의 훈격은 3등급인 독립장에 불과하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문 이사장은 “최 선생의 공훈은 대통령장이나 대한민국장을 받은 분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며 “1962년 서훈 수여 당시 선생의 후손이 국내에 없고 강제이주로 독립운동 자료가 소실됐으며, 남북이 분단되고 러시아가 소비에트 시절일 때 최 선생의 국적이 러시아라는 이유로 훈격이 저평가됐다”고 주장했다.

 

최재형 선생 독립운동기념관 내부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문 이사장은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연해주에서 32개의 한인 학교를 세우고, 항일 독립의군들에게 무기와 의식주를 지원하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직접적으로 도운 선생의 발자취를 2012년 연해주 여행 중 처음 접하고 선생의 드라마틱하고 입지전적 삶에 빨려 들어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기업가, 교육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해 우리 청소년들이 본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문 이사장은 “1920년 일본이 저지른 4월 5일 참변 때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4월 7일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어디에 묻혀 계신지도 모르는 상태”라면서 “국가가 나서서 유해를 찾아서 조국으로 모셔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는 최재형장학회를 설립해 100여 명의 국내외 고려인 학생에게 장학금도 지원해왔다”며 “4월 4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최재형순국 100주년 추모위원회를 발족하고, 4월 5일 99주기 추모식을 서울현충원에서 개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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