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박정희 흉상 철거' 대자보.. "스승의 날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

사범대 전신 '대구사범학교' 출신 박정희 기념 위해 1971년 신관 흉상 설치...이후 존치 논란

서울의소리 | 입력 : 2019/05/16 [11:45]

통렬한 박정희 비판 대자보.. "항일과 친일,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

 

경북 사범대에 있는 '박정희 흉상'  옆에 부착된  박정희 비판 대자보 "진정한 스승은 누구?" 평화뉴스

 

'스승의 날'인 5월 15일 경북대학교에 '박정희 흉상' 옆에 통렬한 비판성 대자보가 붙었다. 이날 경북대 사범대학 신관 입구와 건물 내 박정희 부조 흉상 옆에는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 삼일운동 백주년, 스승의 날을 맞이하며”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는 "여기 한 사람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초등학교에 적을 두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 군인으로 산 자"라며 "일제 충성 맹세 혈서를 써 입학 후 해방까지 일제 군인으로 살았다"고 대자보에서 밝혔다.

 

대자보는 "그가 자격 기준보다 나이도 많고 군 경력도 없었지만 혈서도 마다 않는 노력으로 1940년 1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항일운동을 진압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해방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까지도 만주국 군인이었고, 그해 9월 이번엔 광복군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1961년 군사 쿠데타로 대한민국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대통령이 되고, 1972년 살벌한 유신독재체제를 구축했다”고 적었다.

 

이어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던 여정남을 비롯하여 무려 8명이 사형선고 하루 만에 사법살해를 당했던 것도 유신독재 시기였다. 1979년 그는(박정희) 끝내 부하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라고 적혀 있다.

 

덧붙여 “그가 최고 권력자로 시퍼렇게 살아있던 1971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는 그를 이렇게 큰 흉상부조로 만들어 벽면에 박아 두었다. 그를 “성실한 교사”로 지칭하고 사범대학 학생들에게 기억하도록 하고 있다“고 밝힌 후 대구사범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썼다.

 

그러면서 “해방 후 1960년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2.28항쟁을 벌였을 때, 경북고등학교 교장으로서 시위 학생 징계를 끝내 막아냈던 분. 평생 교단에 섰고, 수많은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김영기 선생.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은 예비교사들에게 도대체 누구를 기억하게 할 것인가?”라고 물으면서 스승의 날을 맞아 사범대학 한 졸업생이 붙였다고 적혀 있다.

 

대자보에 또 다른 6명의 이름도 거명했다. 대구사범학교 출신 민족독립 교사들이다. 그는 "대구사범학교 출신 또 다른 스승들이 있다"면서 "선배 박정희가 교단을 버리고 일제 군인이 된 1941년 대구사범학교 재학생 300여명은 일제 경찰에 연행돼 고문과 조사를 받고 이 가운데 최종 35명은 구속됐다. 바로 '독서회사건' 또는 '대구사범학교 항일비밀결사사건'에 연루된 이들"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이들은 일제에 맞서 민족독립을 위해 한글 잡지를 만들고 몰래 한글 문학서를 읽으며 토론한 진정한 스승들"이라며 "그러나 이들은 일제 재판장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고문과 영양실조로 끝내 옥사했다"고 밝혔다.

 

박찬웅(1943년 6월 21일 옥사), 박제민(1943년 10월 6일 옥사), 강두안(1944년 12월 옥사), 장세파(1945년 6월 13일 옥사), 서진구(1944년 7월 옥사) 선생 등 5명이다. 이어 "또 한 명의 스승이 있다"며 "김영기(1901~1984년) 선생은 조선말과 역사를 가르치다 1941년 학생들과 함께 연행됐고, 1960년에는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에 대한 징계도 막았다"고 했다.  


같은 사범대 출신 선배들의 항일과 친일이라는 너무 다른 행적을 비교하며 후배들에게 어떤 교사가 돼야하는지를 묻는 게 대자보 내용인 셈이다. 말미에 "경북대 사범대는 1971년 그를(박정희) 기념하는 흉상을 만들었다"며 "그를 '성실한 교사'로 지칭해 사범대 학생들에게 기억하도록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경북대 사범대는 예비 교사들에게 도대체 누구를 기억하게 할 것인지 묻고 싶다"면서 "박정희 흉상 앞에 선 오늘 후배들에게 진정한 역사의 스승들을 닮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5월 말 자진 철거하겠다며 적힌 전화번호는 한국 비정규교수노동조합 경북대분회 사무실이었다. 노조 관계자는 “뜻이 맞는 조합원들이 대자보를 부착했고, 박정희 대통령 흉상이 붙어있을 만큼 가치가 있느냐, 철거하라는 뜻을 담았다”고 말했다. 대자보를 쓴 주인공은 경북대 사범대학 졸업생 A 씨로 밝혀졌다.

 

1971년 경북대는 사범대 신관을 신축하면서 대구사범학교 출신 박정희를 기념하기 위해 흉상을 제작해 1층 로비 벽면에 부착했다. 1980년대에는 학생들이 흉상 철거를 시도하기도 했고, 2005년에는 총학생회가 흉상 철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아래는 대자보 내용 전문이다.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 삼일운동 백주년,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여기 한 사람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초등학교에 적을 두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의 군인으로 산 자가 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초등학교 의무복무기간이 끝날 시점에 곧바로 일제 군인을 양성하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지원했다. 그는 징모과(徵募課)로 지원 서류와 함께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와 편지를 보냈다. 

……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 할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할 각오입니다. ……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편지내용 중에서) 

자격기준보다 나이도 많고 군 경력도 없는 상태였지만, 혈서도 마다않는 그의 절절한 노력으로 1940년 1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입학에 성공! 우등생으로 졸업 후, 훌륭하게(!) 군복무. 1942년 10월 일본육군사관학교 편입, 졸업 후 만주국 군인으로 살았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만주에서는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항일운동이 계속 되었고, 만주국 군인들은 이들을 진압했다.  

해방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까지도 만주국 군인이었고, 그 해 9월 이번엔 광복군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1961년 군사쿠데타로 대한민국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대통령이 되고, 1972년 살벌한 유신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던 여정남을 비롯하여 무려 8명이 사형선고 하루 만에 사법살해를 당했던 것도 유신독재시기였다. 1979년 그는 끝내 부하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그가 최고 권력자로 시퍼렇게 살아있던 1971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는 그를 이렇게 큰 흉상부조로 만들어 벽면에 박아 두었다. 그를 “성실한 교사”로 지칭하고 사범대학 학생들에게 기억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 대구사범학교 출신의 또 다른 스승들이 있다. 민족독립과 제대로 된 교사노릇을 꿈꾸었다는 이유로 영원히 교단에 서 보지도 못한 채, 혹은 교단에 선 지 몇 개월 만에 일제의 감옥에 갇혀 돌아가시거나 해방을 맞은 역사의 스승들이 있다. 

대구사범학교 선배인 박정희가 교단을 버리고 만주국에서 일제의 군인이 되고자 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1941년 여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막 교사가 된 이들(1941년 4월 발령), 그리고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던 재학생 등 300여명이 일제경찰에 연행당해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최종 35명이 구속됐다. 이른바 “독서회사건”, 또는 “대구사범학교 항일비밀결사사건”이다. 그들은 일제의 강압적인 교육에 맞서 사범학교 재학시절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 등을 만들었다. 민족독립과 제대로 된 선생노릇을 꿈꾸며 한글 문학서를 몰래 읽고 토론하고 한글잡지도 만들고, 학교 부임 후 감시의 눈을 피해 민족교육을 하며 독립을 준비했다. 

일제 재판부에 따르면, 이들의 죄명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치안유지법’ 위반, “민족의식을 앙양하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방해”한 글을 펴냈기에 ‘출판법’ 위반, “대동아전쟁 등을 방해하고 군사(軍事)에 관해 유언비어”를 퍼트려 ‘육해군 형법’ 위반 등등……. 1941년 여름에 연행된 이들은 무려 2년 5개월 만인 1943년 11월 30일 1심 판결을 받았다. 최종 34명이 2년 6개월에서 5년까지 실형을 선고받았다. 선고 받기도 전에 혹독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이미 두 분은 옥사했다. 선고 후 다시 시작된 혹독한 복역……. 대부분은 해방을 교도소에서 맞았다. 그 사이 세 분이 또 옥사하셨다. 옥사자 다섯 분의 이름은 이렇다. 

박찬웅(충남 논산 노성국민학교 재직 중 구속, 1943년 6월 21일 옥사)
박제민(경북 경주 하서국민학교 재직 중 구속, 1943년 10월 6일 옥사)
강두안(경남 창녕 대합국민학교 재직 중 구속, 1944년 12월 옥사)
장세파(경북 의성 안평국민학교 재직 중 구속, 1945년 6월 13일 옥사)
서진구(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구속, 1944년 7월 옥사) 

또 한 명의 스승이 있다. 김영기 선생(1901-1984년). 그는 1941년 여름 연행당해 6개월 간 학생들과 같이 고초를 당했던 대구사범학교 교사이다. 대구사범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조선말과 역사를 몰래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같은 철창 신세였던 제자들에게 “제군들 한 일이 보람을 거둘 날이 멀지 않았다”고, 부디 몸조심하라고, 애끓는 당부를 한 스승. 해방 후 1960년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2.28항쟁을 벌였을 때, 경북고등학교 교장으로서 시위학생 징계를 끝내 막아냈던 분. 평생 교단에 섰고, 수많은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김영기 선생.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은 예비교사들에게 도대체 누구를 기억하게 할 것인가? 
박정희 흉상 앞에 선 오늘 우리들,  
우리들은 도대체 누구를 교사로, 스승으로 기억해야 할 것인가?

삼일운동 100주년,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한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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