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태민안·국리민복을 위해서는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

부정부패 척결(적폐청산)로 ‘사회정의’를 바로 세워야 경제가 살고 국가가 지탱된다

권혁시 칼럼 | 입력 : 2019/07/02 [10:00]

 

우리나라가 직면한, 내우외환·사면초가의 국내외 정세에 전 국민이 우려하고 힘들어 한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런 불안과 위기 상황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불평등한 독점적 ‘신자유주의’가 발호, 득세한 1990년대 이래 지속되고 있다. 이 사실을 유념하여 더는 신자유주의적 경제론에 부화뇌동, 경도되거나 압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각성,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이다. 국내의 정세는 다행히 막말을 서슴지 않으며 좌파독재, 파탄경제를 성토하던 자유한국당이 태도를 바꾸면서 장기간 지속되었던 의정 중단, 공전 사태가 극적으로 해소된 듯하다.

 

하지만 완전한 국회 정상화는 겹겹이 싸인 여러 가지 난제에 부딪혀 쉽지 않다는 전망에 국민, 특히 서민대중은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이런 무책임한 직무유기에 ‘무노동 무임금’ 적용을 거론할 정도로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그런 한편, 국외정세 역시 어제 30일, 드라마틱했던 역사적 남·북·미 정상의 회동, 그 고무적이고 희망적인 ‘남북 평화교린’의 시그널 외에는 거의가 여의치 않은 바, 한국경제에 막급한 피해를 입힐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은, 중국이 마치 대미항전 총동원령을 내린 듯한 형국의 극한으로 치달았다. 그런 와중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건 차치하고, 세계인들의 초미의 관심은 최후의 승자는 어느 나라인가에 쏠려 있다.

 

그러나 감히 단언컨대, 중국이 G2 강대국으로 부상하기는 했으나, 결코 미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왜나하면 중국이 공동체(국가)와 구성원(국민)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전 분야의 수준은 물론, ‘사회정의’(social justice)에 대한 도덕적 의식수준도 아직은 미국에 능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역분쟁이 경제 이슈인 만큼 그와 결부된 단 한 가지의 사실로 분명히 입증된다. 이 지구상에서 내수경기만으로 자립경제가 가능한 거의 유일한 국가가 미국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불사하는 것은 세계 최고의 병서 ‘손자병법’(孫子兵法, Suntzu pingfa)의 나라인데도, 섣불리 병법을 무시하여 위기와 위험을 자초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한 원인이 중국인 특유의 허세 때문이거나, (그보다는, '홍콩 사태'에서 나타나듯) 전에 없이 강력한 ‘1인독재체제’ 구축에 올인하고 있는 중국의 국가주석, 최고 권력자인 시진핑(習近平, 습근평)의 오만, 독선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더욱더 큰 문제는 독재정치, 특히 1인독재는 권력의 무한집중을 기도하는 탓에 어떤 경우에도 ‘사회정의’가 구현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특별히 거론하는 까닭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정의’(justice)가 바로 서지 않고서는 정치·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가 도저히 살아날 수 없어서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①주거, ②교육, ③건강, ④소득, ⑤직업, ⑥환경, ⑦공동체, ⑧시민참여, ⑨삶의 만족, ⑩안전, ⑪일과 삶의 균형 등, 11개 부문을 평가하여 각국의 ‘더 나은 삶의 질 지수’를 내놓는다. 한국은 폴란드, 라트라비아, 포르투칼 등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최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를 잘 들여다보면 정의(특히, ‘분배정의’)의 극심한 교란으로 인한 경제적 양극화, 달리 말하면 ‘저성장 불균형’ 경제구조가 근본원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고, 그래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사회정의에 관한 양심적·도덕적 의식수준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큰 환겅 부문이 37위로 크게 뒤처져 있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국민건강·생명을 위협하는 대기오염은 38위, 꼴지의 불명예를 안았다(2016년 5월 OECD 발표, 한국의 평균 초미세먼지(PM 2.5) 농도는 OECD 평균의 2배 이상인 29.1 ㎍/m³, 이는 WHO(세계보건기구) 지침 10 ㎍/m³의 3배에 달한다). 어디 그뿐인가. 얼마 전에 통일연구원(KINU, 국무총리 휘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국민여론 (대면)조사 결과를 놓고, “통일은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이제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성취해야 하는 절대 목표가 아니다” 그렇게 국민의 통일에 대한 부정적·소극적 인식을 정당화하는, 즉 오류의 일반화를 (의외로 강도 높게) 당연시하였다.

 

이는 세계 유수의 한 전문기관이 ‘남북통일 시너지효과’에 의한 G3 강대국으로 도약을 예측할 만큼 대단히 긍정적이며, 남북한의 미래가 달린 우리 한민족의 오랜 숙원인 점을 모르거나 잊고 하는 소리, 무지가 아니면 망각의 소치일 터이다. 그에 더해 어느 수구 언론은 경제발전이 중요하므로 이를 위해서라면 사회정의를 반드시 준행할 필요가 없다는 국민여론을 대서특필하였다. 물론 경제적 안정이 중요하지만, 정의가 추동해야 비로소 경제의 안정적 발전(효율성·공평성 증대)이 가능하며, ‘경제원리’에 부합된 의미와 가치가 극대화될 수 있음을 올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남북평화통일·민족번영’ 실현의 당위성을 정립·선도하고, 불편부당하며, 정론직필해야 할 국책 연구기관, 메이저 언론, 그리고 특히, 여기서(이를 통해) 오피니언 리더로서 공명정대하며 무사공평한 논리를 거침없이 폄으로써 ‘지(知)의 의무’를 다하는 지식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무분별하고 무책임하게도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단견, 편견을 버젓이 내세워 사실을 왜곡하며, 이로써 국민을 호도하기를 일삼는 경우가 허다하고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이를 걱정치 않을 수 없고 개탄을 금치 못하는 동시에, 앞서 미중의 무역분쟁과 OECD의 삶의 질 평가를 특별히 부언한 것이다. 그러한 까닭은 ‘사회정의’가 바로 서야 만사형통, 경제가 불길처럼 살아나고 국가가 튼튼히 지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만인 주지의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양심적·도덕적 본성에 의한 ‘사회정의’가 온데간데없어졌으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찌 비분강개하여 통탄치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럴진대 현재 한국의 전 분야에 걸친 부조리와 파행적 사태를 지도자·위정자들은 똑바로 인식, 자각하여 통렬한 반성과 발상의 전환, 신사고를 통하여 불굴의 의지로 ‘사회정의’를 투철히 실천해야만 한다.

 

개인(국민)이든 공동체(국가)이든 ‘정의’를 잃어 부패해지면 여지없이 파멸에 이르고 마는 것이 천리(天理)이다. 아울러 부패 주도세력은 망하기 직전까지도 ‘반구저기’(反求諸己), 그 원인이 오로지 자신이라는 사실을 끝내 외면하고, 다른 이유를 찾기에 급급하며, 당연하다는 듯 제 3자에게 전가시키는 기만술책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행태는 오랜 인류역사가 끊임없이 말해주는 그 자체로써 명정한 교훈인 것이다.

 

‘경제정의’(분배정의)의 신학적·철학적 이론 정립
아우구스티누스(신국론)의 ‘정의론’,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

 

예컨대 로마인들이 세계의 종말로 인식했던, 용병대장 알라리쿠스가 이끄는 게르만(서고트)족 용병들이 410년 8월, 천년 고도 로마를 점령했던 사태가 바로 그렇다. 부패하여 정신력 마저 쇠미해진 로마군은 지리멸렬했고 그런 탓에 파괴와 약탈이 자행되는 가운데, 전 로마인에게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 로마제국 영광의 상징이며 신성불가침의 도시로 여겼던 로마의 함락은 극도의 충격을 넘어 극한의 절망적 사태였다. “세상에서 빛이 꺼져버렸다. 로마의 멸망은 결국 전 인류의 멸망이다” (히에로니무스)

 

이렇게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로마의 쇠퇴, 그 비극을 불러온 용병들의 봉기, 반란의 분명한 원인은 오직 장기간 지속된 임금체불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공인과, 가톨릭교회의 국교화가 로마제국의 몰락을 불러왔다는 주장을 펴며 책임전가로 일관하였다(그리스도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칙령'에 의거 공인된 후, 급성장하여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는 또한 로마의 고대 신앙이 회귀, 복고하는 양상을 드러내면서 지난 4세기 동안 이교(異敎)가 정치적·사회적으로는 패퇴했으나 사상적·이론적으로는 완전히 쇠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극도의 혼란과 위기 속에서 로마의 대다수 기득권자, 재력가들은 북아프리카의 영지로 도피하였다. 그런데 이 지역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는, 젊은 시절의 방탕과 극적인 회개로 유명한 중세 초기 교부철학의 태두인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였다.

 

그는 로마의 실력자인 이들 도피자들이 주장하는 로마 쇠퇴에 대한 책임론의 부당성을 반박하고, 비판에는 반론을 제기함과 아울러 정신적 지도자로서 이교적 사상과 이론을 논파하여 위기에 대응(response)하고자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집필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탄생한 명저가 ‘신국론’(神國論, de civitate dei)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13년부터 장장 14년, 인고의 세월을 바쳐 저술하였으며 426년, 세상을 뜨기 불과 4년 전에 22권의 저서, 곧 '대작으로써 힘든 작업'(magnum opus et arduum)을 각고의 노력 끝에 완결했던 것이다.

 

신국론의 핵심적 주제가 신학(神學)임은 불문가지이다. 천지창조 이래의 인류역사를 성서에 명시된 세상의 국가와 신의 국가(신국)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는데, 전기 10권은 지상의 나라, 후기 12권은 신의 나라를 논설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도덕적·철학적·정치적, 그리고 인간세의 역사적 관점 등과 모든 이슈들을 망라·통섭한 대작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단한 가치를 지닌, 세계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불후의 명저인 것이다.

 

그런데, 1천5백 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 중에서 로마인(특히, 기득권 세력)의 로마 쇠망에 대한 기만술책을 통렬하게 강력히 반박, 비판한 핵심적 이슈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두에서 언급한 ‘정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가 강고히 바로 섰던 초기 로마가 어떻게, 얼마만큼 번영할 수 있었는지를 세세히 구체적으로 적었다. 그렇게 하여 정의가 사라지면서 자신의 조국 로마가 몰락의 위기와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쇠퇴 일로를 걸어 쇠망으로 빠져든 사실과 이유를 명확히 밝혔다.

 

그리하여 어느 때 누구이든 이를 타산지석의 교훈삼아 이 같은 사태를 방지하고 극복하도록 도리와 방도를 제시하였다. 그는, 따라서 비단 로마제국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들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였거니와, “정의가 없는 국가는 거대한 강도 무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Ⅳ,4) 이렇게 반문함으로써 그런 이유를 명명백백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분명한 사실을 실감나게 인식시키려는 듯 알렉산더 대왕과 그에게 체포된 해적이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였다.

 

알렉산더가 해적에게 추궁한다. “어떤 생각으로 바다에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가?” 이 물음에 (겁 없는) 그 해적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것은 왕께서 온 세상을 괴롭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단지 작은 배 한 척으로 그런 짓을 했기에 해적으로 불리는 것이고, 왕께서는 커다란 함대를 거느리고 다니면서 그 일을 하므로 대왕으로 불리는 것이 다를 따름이지요” (‘신국론’ Ⅳ,4)

 

위대한 신학·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내린 결론인 즉, 강도 무리와 국가란 이렇듯 겉으로는 대차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인간으로 구성되고, 대개 한 사람이 다스리며, 구성체의 규범이 있어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획득한 물질은 다 같이 일정한 기준·원칙에 의거 배분된다. 서로 반목·갈등하여 분란을 일으켜서는 작업(약탈)에도 지장을 주므로 그들만의 정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지론인 것이다. 그런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定義, definition)하는 ‘정의’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장황하고 번잡스럽지 않다.

 

인간적으로 가치 있는 ‘전통’을 쫓는(지키는) 것, 즉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 ('신국론' ⅪⅩ,12 ㅡ 일맥 상통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규명한 정의의 본질은 ‘평등’이며, 성서적 '정의'(체다카, 분배정의)는 선택이 아닌 의무이다; 신명기 15,11 : 15,1-3 : 레위기 25,8-10·23 : 4,32-35 : 사도행전 2,44-45 : 4,32-35) 그리고, 이 같은 ‘정의’를 엄수하지 않고 불법을 자행하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가할 수 없도록 엄중히 징벌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도 강도 무리의 세력이 강대하여 그들의 사리사욕을 위한 생각과 행위가 징벌되지 못한 탓에 정당한 집단인양 행세한다.

 

이처럼 진정으로 ‘정의’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전 세계를 정복하여 지배하는 로마제국 역시 진정한 ‘공화국’(res publica)이 아니라 강도 무리, 도적 떼에 지나지 않는다고 서슬 퍼렇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현세를 사는 우리는 여전히 초기 중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통하여 갈파한 ‘정의’가 전 사회구성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인데도 빈부격차의 심화, 이른바 ‘1 대 99 양극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 점에서 부연컨대, 재력(재산)이란 공동체에 터잡아 사회(활동)를 통하여 형성·축적되므로 일정부분은 사회에 환원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이른바 ‘경제정의’(economic justice, 분배정의)에 의거한 책임적 사회,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의무이며, 이는 정의구현의 핵심이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4) 이 정언명령을 실천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추구한 ‘사회정의’를  실현시켜야 하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국민경제의 핫 이슈인 교육·주거·의료(민생경제 3대과제)에 대한 ‘공개념제도(정신)’를 국민교육의 보편성·공공성·평등성, 토지·주택 누진중과세 및 공공주택 분양가 적정화, 의료의 비영리 강화를 철저히 실행하여 성공적으로 완결해만 한다.

 

 

대한글씨검정교육회 

권혁시 이사장

이를 위해서, 국태민안(國泰民安)·국리민복 (國利民福)을 위하여 정의에 반하는, 만악의 근원인 ‘부정부패’의 뿌리, 그 사리사욕과 아집을 가차없이 뽑아 버려야 한다. 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통렬히 고발한 정의의 가면을 쓴 강도무리(정치·행정·사법), 그 도적떼의 근성(적폐)을 확실히 척결해야 한다. 그러한 연후에 지금까지 노정해 왔던 정치파행과 국정실패를 뒤로 하고, 역할분담의 원리원칙을 지켜 따라야 한다. 그래서 먼저 지식인(집단)의 문제파악과 해결책 제시를 시발로, 언론이 이를 사회 전체적으로 조성하며, 정부·의회는 정책적으로 철투철미하게 발제·결의하고 집행·완수해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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