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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다 망언' 더욱 업그레이드된 '구로다 망언'.. “일본인에게 예 차리지 말라“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의 '일본산고(日本散考)'..'일본 뼈 때리는 박경리를 새기자'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9/07/15 [10:04]

'구보다 망언' 더욱 업그레이드된 '구로다 망언'.. “일본인에게 예 차리지 말라“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의 '일본산고(日本散考)'..'일본 뼈 때리는 박경리를 새기자'

서울의소리 | 입력 : 2019/07/15 [10:04]

“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접대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한다.”

박경리 선생이 일본의 우파 역사학자인 '다나카 아키라와'가 1990년 8.15에 즈음하여 '신동아'에 발표한 "한국인의 '통속민족주의'에 실망합니다"라는 글에 대해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신랄하고 통렬하게 반박한 글이다. 선생은 이어 다음과 같이 직격탄을 날렸다.

 

'몇 해 전의 일이다. 일본의 어느 잡지사 편집장이 내 집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박경리(1926~2008년) 선생이 생전 일본에 관해 썼던 글을 모은 책 ‘일본산고’가 재조명되면서 14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1, 2,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3부를 발췌한 게시물이 여러 개 올라왔다.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작가의 일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맞물려 떨어지고 있다.

 

"나는 철두철미한 반일 작가입니다"라고 말한 선생은 조선말의 몰락으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사를 관통한 대하역사 소설 '토지'를 25년에 걸쳐서 썼다. 마무리 한 날은 1994년 8월 15일로 광복절로 그 의미가 깊다.

 

선생은 생전에 '신동아'에 기고한 일본 역사학자 아키라와의 글을 잘 썼다며 홀딱 넘어간 우리의 젊은이들이 있어 반박 글을 안 쓸 수가 없었다며 이를 깨우침의 계기로 아키히라의 '일등국민'을 자임하는 일본 특유의 허세 글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판을 한 이유다.

 

생전의 박경리 작가가 일본에 대해 썼던 글을 모아 2013년 펴낸 책 ‘일본산고’. 네이버 책 캡처

 

일본 역사학자 아키라와는 '통속민주주의의 성행', '타자에게 얽매이는 한국인', '반일도 대중화 시대로', '사죄는 마음의 문제' 등의 소제목으로 한국인의 반일감정을 비난했다. 그런데 이런 일본인의 우월주의적 사고에 기인한 망언은 시시때때로 망령처럼 되살아나고 있다.

 

그 시초는 1953년의 그 유명한 '구보다 망언'이 있다. 한국과 일본 간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은 이승만 정부 때인 1951년 10월 20일 시작됐다. 일본 측은 “한국이 일본에 재산청구의 권리가 있다면 일본도 식민지 시대 한국에 있던 일본인 재산에 대해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하면서 일본은 초장부터 어깃장을 놓는 불손한 태도로 나왔다.

 

1953년의 3차 한·일 회담은 ‘구보다 망언’으로 협상 개시 2주 만에 결렬됐다. 일본 수석대표인 구보다 간이치로는 한국의 청구권 주장에 대해 “일본은 36년간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일본이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돼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보다의 어처구니없는 망언에 한국은 “마치 일본이 점령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으나,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라며 조목조목 반박하고 한국 대표단은 구보다 발언을 ‘회담의 기본정신을 망각한 묵과할 수 없는 망언’으로 규정해 회담을 중단했다. 

 

그리고 66년이 흐른 2019년 7월, '구보다 망언'에서 더욱 업그레이드된 '구로다 망언'이 나와 일본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한 게 없다. 일본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수출 규제를 시행하자 우리나라는 자발적으로 일본 제품 불매운동 여론이 확산됐다. 그러나 일본 극우언론인 산께이 신문은 이를 비열하다며 연일 비난을 앞세우고 있다.

 

여기에 일본 산케이 신문 전 서울지국장이자 현재 산케이 객원논설위원인 구로다 가쓰히로의 발언이 우리의 공분을 사고 있다.

 

그는 그간 한국이 일본 덕으로 경제 발전한 것 무시하고 있다며 이번 수출 규제로 깨달았을 것이라는 막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그는 지난 13일 산케이신문에 쓴 칼럼에서 "한국은 1965년 수교 이후 한국의 발전에 대한 일본의 협력이나 공헌 등을 무시해왔다"며 이를 한국 소식통들 사이에서는 '일본 감추기(日本隠し)'라고 부른다고 했다.


구로다 전 지국장은 이런 여론의 반응은 한국이 그간 '일본 감추기'를 해온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일본 감추기'는 한국의 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고 했다. 이어 "이번 기회에 '(한국이) 일본에 신세를 져 왔다'는 숨겨진 실체가 알려지면, 대일 감정도 다소 개선될 수 있을까?"라며 한국에 일본이 엄청난 시혜를 베푼 것처럼 썼다.

 

구로다의 발언이 참으로 점입가경이다. '일본에 신세를 져왔다'가 아니라 '서로 호혜적으로 양국이 교류해 왔다'가 맞는 말이 아닌가. 2차 대전에 무모하게 끼어들어 핵으로 패망하고 다 죽어가다 1950년 한국전쟁 군수물자 특수로 기사회생한 게 일본이다.

 

수천 년 동안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를 통해 백제에서 시작해 일본으로 넘어간 문물 덕분에 여자나 남자나 '훈도시'라는 아랫도리만 겨우 천으로 가리고 살던 문화적으로 미개했던 일본이 옷이나마 제대로 입고 다닌 게 아닌가. 

 

여기서 다시 박경리 선생의 '일본산고'가 소환된다. 선생은 일본을 어떤 명분으로라든지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에게도 일침을 날렸다.

 

“지금은 총독도 없고 말단 주재소의 순사도 없다. 우리를 겨누는 총칼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어째서 일본을 성토하면 안 되는가.” 일제 강점기를 살아냈고, 그 엄혹했던 일제강점기를 대하소설 ‘토지’ 등으로 풀어낸 노작가가 “일본과 전쟁이라도 하려는 것이냐”는 일부 보수층에게 수십 년 전에 이미 통렬한 성찰의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구로다는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의 배상금은 독립 축하금 또는 경제협력 자금이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외교적인 판단이었을 뿐 법적으로 인정받은 게 아니라는 우리의 주장에 “과거사 문제는 어디까지나 상대가 있는 외교적인 문제”라며 일본의 책임을 회피하는 주장을 했다.

 

일본이 한국에 보상했다고 준 턱도 없는 배상금은 식민지 착취에 대해 '당연히' 해야 할 보상으로서의 돈이었지 '고마워해야 할 돈'은 아니다. 발전할 기반을 빼앗아 놓고 그걸 일부 돌려준 후 '고마워해라'는 논리는 가해 당사자인 일본이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그것도 배상금 이란 용어도 아니고 독립축하금이라 했다. 그 기간동안 일본이 우리 땅에서 수탈한 문화재와 금을 비롯한 광물과 지하자원은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자칭 보수라고 내세우는 이 나라 일부 정치인이나 언론이 제나라 모욕하는 데도 참으라는 거는 세계 어디에도 없고 이 나라밖에 없을 거다. 잘못한 쪽이 몽둥이를 든 꼴로, 가해자가 피해자를 윽박지르는 데도 당당히 맞서지 말고 지금도 굴종외교을 외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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