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특집] '전쟁영웅의 탈'을 쓴 친일 백선엽에 가린 독립군 출신 김홍일

현충원 내 가장 명당자리로 꼽히는 '장군2묘역'에 “야스쿠니에 묻히고 싶다”던 신태영, 이응준 등 묻혀"

서울의소리 | 입력 : 2020/08/15 [18:57]

'광복 75주년을 맞고도 일제에 부역했던 군인 발 아래 임정 요인들 잠들어 있어'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 전공 과도 평가.. 독립군 출신 김홍일, 전공 과도하게 저평가'

 

김홍일 장군. 사진/위키백과

 

엄혹했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광복을 맞은지 7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해방 이후 노덕술 같은 친일 경찰이 독립군을 고문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던 것은 물론, 지금도 친일파 후손은 일제에 부역해 남겨준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는 데 반해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뉴스1'에 따르면 이를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실이 바로 국립현중원에 안장돼 있는 친일파 68명의 묘지다. 서울과 대전현충원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는 친일 인사가 각각 35명, 33명이 묻혀있다. 지난번 안장된 백선엽을 비롯해 이 가운데 국가가 공인한 친일파만 따져도 김백일·신응균·신태영·이응준·이종찬·김홍준·백낙준·신현준·김석범·송석하·백홍석 등 12명에 이른다.

 

특히 문제시 되는 인물은 장군2묘역에 묻혀있는 신태영과 이응준이다. 장군2묘역은 현충원 내에서도 명당자리로 꼽히는 곳이다. 동작구 현충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인 것은 물론, 다른 곳과 달리 딱 6명만 묻혀있는 곳이라 공간도 넉넉하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 곳에서 내려다 본 위치가 바로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이다. 친일파의 발 아래 임정 요인들이 묻혀있는 것이다. 직선거리로 가까운 묘역은 불과 80m, 멀어도 150m에 지나지 않는다. 

 

 

이응준이 이 곳에 묻힐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그는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는데, 주로 블라디보스토크나 간도 전선에 배치돼 정탐 활동을 담당했다.

 

중일전쟁 당시에도 산동성에서 직접 팔로군과 싸웠고 수없는 싸움에 참전해 대좌까지 진급한 인물이다. 그는 30여년을 일본군으로 복무하면서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군인이 돼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기도 했다.

 

그의 동기인 지청천과 김경천은 3·1 운동 이후 일본군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에 나섰으나 함께 망명 계획까지 세웠던 이응준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심지어 지청천 장군은 사후 이응준의 발 아래 잠들어 있다. 이응준은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도 받는다. 광복 이후 정식 군 훈련을 받은 사람이 부족했던 우리나라는 미군정에 의해 대다수의 일본 장교 출신 인사들을 주요 직책 배치한다.

 

일본군 내에서 일제 패망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렸던 이응준도 함경남도 원산항에서 수송 업무를 담당하다 탈출해 서울로 들어왔고 숨죽여지내다 미군정의 호출을 받고 그들의 의지로 대령으로 특별임관했으며 1948년에는 초대 총참모장까지 오른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국가가 공인한 신태영 역시 대한민국 4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일본군으로만 30여년을 복무했다.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18년 중위로 진급하고,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 1924년을 전후해 조선 주둔군으로 옮겨간 뒤 소좌까지 진급했다.

 

신태영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올린 수기에는 "조선인들은 한시 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안장)다"라며 스스로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신태영은 이응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력을 무기로 빨치산을 잡겠다는 목적으로 입대했다. 1949년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예편 후에는 제4대 국방부장관직까지 오른 뒤 재향군인회회장을 지냈다.

 

그의 묘소로부터 단 3기 떨어진 곳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장남이자 해군 창설의 주역인 손원일 제독이 안장돼 있다. 독립을 향한 열망이 남달랐던 손 목사의 일가와 대를 이어 일본군에 복무한 이가 나란히 같은 묘역에 몸을 누인 셈이다. 또 장군 제2묘역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산화한 독립군 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서울 현충원 가장  명당 자리에 위치한  국가 공인 친일파 신태영의 묘. 사진/한국일보
장군 제 2묘역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진 독립군의 넋을 기리는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이 설치돼 있다. 사진/한국일보

 

한국전 진짜 영웅.. 백선엽에 가린 독립군 출신 '육군참모학교' 교장 김홍일

 

현충원에 묻힌 인물 중 특히 그 행적이 대척점에 있는 두 사람이 있다. 바로 백선엽 장군과 김홍일 장군이다.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에 따르면 그동안 한국에서는 백선엽의 역할만 부각됐을 뿐, 김홍일의 역할은 거의 평가되지 않았다. 하지만 6·25 때 실제 벌어진 상황을 보면, 김홍일보다 백선엽이 더 부각돼 있는 현실이 상당히 불공정하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6.25 한국전쟁 당시 단 3일 만에 한강 이북을 점령한 인민군이 5일간이나 한강 이북에 묶인 것은 한강선 방어전투를 수행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시흥사) 때문이었다. 6월 28일까지만 해도 육군참모학교 교장이었던 김홍일 소장(1898~1980)이 시흥사의 지휘관이었다.

 

야전부대 지휘관도 아닌 참모학교 교장이 시흥사를 맡게 된 것은 6월 25일부터 단 3일 사이에 국군의 시스템이 대거 손상됐기 때문이다. 가장 절실한 한강선 방어를 '교장 선생님'에게 맡겨야 할 만큼 국군의 처지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홍일은 교육 및 기획 능력 못지않게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21세 때인 1919년 중국으로 가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와 소련에서 항일전투에 참여했다. 또 장개석(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참가해 참모장 등을 역임했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서도 교관으로 활약했다. 또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광복군에도 참가했다. 1945년 5월에는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했다.

 

김홍일은 항일투쟁의 기념비적 사건에도 가담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의 숨은 공신이 바로 그였다. 윤봉길이 던진 '도시락 폭탄'이 그의 손을 거쳤던 것이다. 독립투사 정정화의 회고록 <장강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시 중국 중앙군에는 한인 군관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중에 가장 직위도 높으며 중국의 실권자인 장개석의 개인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사람은 중국군에서 왕웅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김홍일이었다.

 

그는 상해의 조병창에서도 근무했는데, 이봉창 의사가 수류탄의 성능 때문에 왜황을 죽이는 데 실패하자, 백범은 그에게 특제 폭탄을 비밀리에 제조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 결과 물통 모양과 도시락 모양으로 된 특제 폭탄 수십 개가 만들어졌고, 홍구(홍커우) 공원의 의거 때는 고성능의 폭탄을 사용하여 왜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사열대를 단숨에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국군이 사실상 와해된 한국전쟁 초기에 한강 방어선을 맡은 장군은 독립군 출신이었다. 국군 상층부를 장악한 친일파들이 뒤로 물러나고 이때는 독립군 출신이 국군의 운명을 책임졌던 것이다.

 

김홍일이 지휘하는 시흥사는 형식적으로는 사단급 부대였지만, 실제 보유한 전력은 그에 훨씬 못 미쳤다. 그나마도 이 부대는 급조된 부대였다. 한강 이북에서 후퇴하는 병력을 수습해서 조직한 부대였다. 패잔병들로 구성된 부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김홍일의 역할은 '남북한의 대결 구도'가 '한국·미국 대 북한의 대결 구도'로 바뀔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미군이 방어태세를 갖춘 뒤인 7월 3일, 김홍일은 한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그날 인민군은 대규모 한강 도하를 개시했다. 너무 뒤늦은 도하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백선엽이 아니라 김홍일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백선엽은 미군이 주도권을 잡은 상태에서 전공을 세운 데 반해, 김홍일은 미군이 없는 상태에서 인민군을 묶어놓았다. 김홍일이 없었다면, 미군의 참전이 '뒤늦은 참전'이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홍일이 있었기에 인민군의 도하가 '뒤늦은 도하'가 되고 말았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백선엽이 받는 찬사의 상당부분은 실은 김홍일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백선엽은 김홍일에게 돌아가야 할 찬사를 상당부분 차지했을 뿐 아니라 김홍일의 활동에도 적지 않은 지장을 주었다. 서울이 함락되기 전날인 6월 27일 오후,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참모총장)은 '문산지구 제1사단장인 백선엽 대령의 작전을 지도하라'는 명령을 김홍일 소장에게 내렸다.

 

이에 따라 김홍일 소장은 백선엽 대령의 전투 상황을 관찰했고, 백선엽 부대가 적의 포위망에 들어가고 있다는 직감을 갖게 됐다. 그래서 백선엽에게 신속히 후퇴해 한강 방어에 주력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백선엽은 지시를 거부했다. 자기는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총참모장이 김홍일에게 부여한 권한이 백선엽에 대한 지휘권이 아니라 작전 지도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지만, 백선엽의 지시 거부는 전쟁 초반에 국군의 전력 손실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됐다.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 속해 일본을 위해 독립군 사살을 서슴지 않은 인물이다. 만주군 출신인 백선엽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김홍일은 한강 방어선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제1군단장이 된 뒤에도 만주군 출신들 때문에 시련을 겪었다. 9월 1일 김홍일은 만주군 출신들에게 밀려 야전 지휘관에서 물러났다.

 

낙동강 방어전투가 한창이던 그날, 김홍일은 제1군단장에서 육군종합학교 교장으로 전임됐다. 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하던 장군이 전쟁 중에 갑자기 2선으로 밀려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의 6·25 전공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백선엽의 전공이 과도하게 치켜세워진 데 반해 김홍일의 전공은 과도하게 저평가됐다. 김홍일의 지시를 거부하며 국군의 전력 손실을 확대시킨 백선엽은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지금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독립지사와 친일인사가 같은 장소에 묻혀 있는 상황을 두고 "이런 현실을 개선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법 개정을 할 수밖에 없다"라며 "정부가 직권으로 이장하는 법이 매 국회 때마다 발의는 되지만,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그 다음에 특정 세력의 반대 때문에 법 개정은 여전히 안 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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