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물고기를 아십니까

빨갱이’이라는 말은 언제 생겨난 것일까?

서울의소리 | 입력 : 2012/07/11 [00:27]
 

1963년 5대 대선에서 박정희-윤보선 간의 사상논쟁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63.10.14.)

“나는 지금 테로(테러)를 당하고 있어요. 그저 참고 있자니 이 나라의 원수(元首)인 나를 ‘빨갱이’로 몰아치니… 그래 아무리 정권도 좋지만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안가리니 이게 공산당 수법과 다를 게 뭐요? 내가 ‘빨갱이’라면 이 나라가 2년 동안 ‘빨갱이’ 치하에 있었단 말이오? 화제가 ‘빨갱이’ 이야기에 미치자 그는 한층 더 격하게 흥분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야당들이 이번 선거전을 통해 그를 ‘빨갱이’로 모는 데 대한 분노는 밖에서 일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격한 것이었다...”
-- (동아일보, 1963. 10. 14)

때는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투표일을 3일 앞둔 1963년 10월 12일 오후 7시경. 이날 춘천유세를 마치고 공관으로 돌아온 박정희 후보는 저녁은커녕 옷도 갈아입을 생각조차 잊은 채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선거유세 기간 중 상대편 윤보선 후보가 그를 향해 ‘빨갱이’라며 사상(思想)공세를 폈기 때문이었다. 박 의장은 “그저 꾹 참고 있지만 선거만 끝나면... 모조리 가만히 두지 않을 테요...”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박 후보는 여순사건 후 좌익혐의로 군 수사당국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고, 이어 군사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수사과정에서 전향을 하긴 했지만 한 때 ‘빨갱이’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이날 그는 거짓말을 한 셈이다.

‘빨갱이’. 이 말은 우리 근대 백년사에서 ‘친일파’ 만큼이나 치욕적이고 자극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둘 중에서도 ‘빨갱이’는 반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땅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어 왔다. 이 말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한 시대를 넘어 19대 국회 코앞에서 또다시 ‘사상 검증’의 잣대이자 칼날이 되고 있다. ‘공산주의자’를 비하한 표현인 ‘빨갱이’란 말은 대체 우리사회에서 언제, 어떤 경위로 생겨났고 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지난 시절을 기록한 신문기사, 문헌자료 등을 통해 그 내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구글 위키백과에서 ‘빨갱이’를 검색해 보았더니 ‘공산주의자 빨갱이’에 앞서 뜻밖에도 ‘빨갱이’라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 설명이 나왔다. ‘빨갱이’란 ‘농어목 망둑어과의 물고기로 새빨갛고 작은 몸을 가졌으며, 강어귀나 연안에 굴을 파고 생활한다.’고 했다. ‘빨갱이’라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러면서 ‘공산주의자’를 가리키는 비속어인 ‘빨갱이’는 ‘레드 콤플렉스’ 항목을 참조하라길래 거기로 가봤더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공산주의자를 묘사할 때 ‘빨갱이’라고 비하해서 불렀다”고 설명했다.

몸뚱아리 전체가 붉은 색인 ‘빨갱이’ 물고기

이번에는 ‘네이버 국어사전’엘 가보았다. [빨갱이 1]은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빨갱이 2]는 ‘망둑엇과의 바닷물고기’라고 나왔다. 위키백과와 별 차이가 없다. 이번엔 ‘빨갱이’의 어원을 찾아보기 위해 ‘위키 낱말사전’을 검색해보았다. ‘빨갱이’란 [‘빨강+이. 공산주의 이념 가운데 피지배자의 투쟁을 강조하기 위해 빨간색을 상징물에, 특히 국기에 쓴 것에서 아마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신문기사나 그 외 문헌 속에서 ‘빨갱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사례를 통해 그 의미 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공산당 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빨갱이’요, 거짓말쟁이로 통한다. ‘빨갱이’란 말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공산당 정권을 들여앉힌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깃발이 붉었던 데 연유한 것 같다. 공산당은 독재의 쇠사슬에 묶여 있고 생산도구 이상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순박한 백성들을 당의 지령에 복종토록 하기 위해 항시 입버릇처럼 공산천국이 내도한다고 거짓 선전을 일삼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거짓말이란 공산당에겐 아편과 같이 중독이 되고 만 것이다...”
-- (<동아일보> ‘횡설수설’ (1972.2.13.) 중에서)

<동아> 칼럼에서 따르면, ‘빨갱이’는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빨갱이’는 거짓말쟁이며 이는 주로 공산당이 하는 행태요, 둘째, 어원은 볼셰비키 혁명의 깃발이 붉었던 데 연유한 듯하다는 것. 이 짧은 기사 한 대목에는 70년대 당시 보통의 한국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빨갱이’의 의미가 전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순사건, 한국전쟁으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빨갱이’는 이렇게 개념이 굳어졌고 또 널리 사용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빨갱이’이라는 말은 언제 생겨난 것일까?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당시 붉은 깃발과 레닌의 모습을 그린 그림

한국사 관련 문헌사료 검색에 유익한 툴이 몇 있다. 국편이 구축한 ‘한국사데이터베이스’와 독립기념관이 구축한 한국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 한국언론재단이 구축한 고(古)신문 검색서비스가 그것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빨갱이’를 검색해보았더니 총 109건의 자료가 검색되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해방 후 자료들이었다.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개벽> 제10호(1921. 4. 1)에 목성(牧星)이라는 필자가 쓴 ‘깨여가는 길’이라는 글에 ‘빨갱이’라는 말이 여러 군데 등장하였으나 그 내용은 요즘 사용되고 있는 ‘빨갱이’와는 다른 것이었다. 언론재단의 ‘고신문’은 한성순보, 황성신문, 독립신문 등 8종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1883~1945년 사이에는 빨갱이 관련기사가 한 건도 나오지 않았다. <동아일보> 색인집(1920~1959)에는 아예 '빨갱이'라는 항목조차 없었다.

해방 직후 자료로는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에 보관중인 소련군정 문서 가운데 ‘남조선 정세보고서(1946~1947)’(1946.3.27. 작성)에서 당시 한민당 중앙위원 김효석이 <북조선의 대표 5명은 모두 “빨갱이들”이지만, 남조선의 대표 8명은 모두 우익인사들일 수 없다... 이 결과 8명의 대표들 중에 “좌익들”도 있을 수 있다. 이처럼 명백하게 무게 중심이 “빨갱이들”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라고 한 대목이 있고, 이듬해 5월 3일자로 작성된 ‘레베제브가 쉬띄꼬브 대장 동지에게 보낸 남조선 정세에 대한 정보자료’에는 그해 4월 27일 이승만 환영집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박멸하라” “빨갱이들에게 죽음을”이라는 슬로건을 외쳤다고 하는 대목에서 ‘빨갱이’가 등장하는 데 이는 모두 공산주의자 빨갱이를 지칭한 것이었다.

한편, 1948년부터는 ‘빨갱이’가 국내신문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특히 5.10총선거를 앞두고 특정후보자 인신공격의 한 방편으로 ‘모리배’ ‘빨갱이’ 등이 사용되자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경향신문, 1948.4.3.) 또 그 무렵 친일파 청산을 놓고 이 문제를 거론하면 ‘빨갱이’로 몬 사례도 있었다.(세계일보, 1948.9.10.) 제주도의 경우 ‘빨갱이’라는 말이 도민의 감정을 저해한다는 읍면동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지사가 관청에서부터 이를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강원일보, 1948.7.21.)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어서 ‘빨갱이’는 좌익분자나 상대방에 대한 ‘비방’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득중 저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 연구자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문학박사)는 지난 2009년 650페이지 분량의 묵직한 책을 한 권 출간했다. 무엇보다 책 이름이 재미있다. <‘빨갱이’의 탄생>(선인 펴냄). 이 책은 그간 단편적으로 나온 ‘여순사건’ 연구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큼 풍부한 자료와 탄탄한 논리 전개, 게다가 엄정한 역사적 평가도 돋보인다고 하겠다. 김 박사는 이 책에서 우리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 부터라고 단언하였다. 이 책에서는 우리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빨갱이’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빨갱이’란 단어는 단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빨갱이’란 말은 짐승만도 못한 존재, 도덕적으로 파탄 난 비인간적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이르는 말이다. 외국의 경우에도 공산주의자를 폄하하는 용어는 존재한다. 일본에서 사용되는 ‘아카(赤, アカ)’, 구미에서 사용되는 ‘꼬미(commie)’ 등은 모두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일컫는 용어들이다. 이들 용어에는 공산주의자를 폄하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의 ‘빨갱이’처럼 죽여야 하는 대상, 비인간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빨갱이’는 사상적으로는 공산주의자이며, 폄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라는 말이 정치적 지향을 일컫는 것이라면,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적으로 멸시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빨갱이=도덕적 파탄자=민족반역자’여서 죽여야 할 대상인 ‘비인간적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죽음을 당하더라도 마땅한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이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한국의 ‘빨갱이’라는 용어는 세계 반공주의 역사에서 가장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여순사건' 당시 경찰과 우익인사들이 여수시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불러 모아 놓고 빨갱이를 색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박정희 정권 하에서 ‘반공’은 이 땅의 사람들을 ‘국민’과 ‘비국민’으로 가르는 잣대나 마찬가지였다.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을 계기로 ‘빨갱이’라는 용어는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분명한 ‘경계선’으로 등장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 주모자인 좌익세력들을 정국 혼란을 유발한 세력인 동시에 양민을 마구 학살하는 도살자, 악마의 이미지를 씌었다. 그리하여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고, 이제 ‘국민’들에게는 ‘빨갱이’를 박멸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다. 심지어 빨갱이를 죽이는 일이라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사회적 정당성이 용인되었다.

그러나 ‘빨갱이’ 탄생의 원류로 일컬어지는 ‘여순사건’은 공식 간행물에 기록된 것과는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이 김 박사의 주장이다. 우선 ‘여순사건’은 한동안 알려진 것처럼 북한의 지령을 받아 시작된 것도 아니고 남로당 중앙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 ‘여순사건’의 봉기 주체는 14연대 일부 하사관들로 이들은 ‘제주4.3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권의 명령에 대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봉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봉기가 단지 군인들의 반란으로 끝나지 않고 지역민들이 대거 가세하면서 이승만 정권을 위협하게 되면서 무자비한 토벌의 대상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빨갱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에는 군대, 경찰과 같은 공권력뿐만이 아니었다. 언론, 문인, 학자, 종교인 등 보수성향의 지식층이 총동원 되었다. 이들은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좌익의 비인간성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빨갱이’는 극도로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여순사건’ 당시 ‘협력자’ 색출을 위해 ‘편가르기’는 예사였으며, 조금만 혐의가 엿보여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여순사건’ 당시 군경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라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해방 공간에서 생겨난 ‘빨갱이’라는 말은 반백년의 역사가 흐른 지금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한번 ‘빨갱이’로 낙인찍히면 한국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살아남기 어렵다. 노구를 이끌고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과 담판 끝에 대북사업을 추진했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같은 사람도 평소 ‘빨갱이’를 예사로 입에 올렸다. 지난 89년 2월 북한을 다녀온 정 전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권용목 전 현대엔진 노조위원장 등이 “빨갱이 나라인 북한에 가면서 이제는 우리보고 빨갱이라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자 정 전 회장은 “앞으로 머리에 빨간띠만 매지 않으면 빨갱이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한겨레, 1989.2.4.) 정 전 회장은 노조원들이 빨간 머리띠만 매도 ‘빨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 http://blog.ohmynews.com/jeongwh59/
 
정운현-20여 년간 중앙일보,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3년여 동안 국가기관과 공기관에서 임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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