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이 흐느끼고, 땅이 신음하고, 끝내는 하늘이 눈물을 뿌리셨나이다.

장준하선생의 겨레장!

서울의소리 | 입력 : 2013/03/31 [11:58]

일제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는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한 활달하고 심오한 필치와, 해방된 나라를 다시 더럽히는 친일군부독재의 청산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만개한 민주주의와, 7천만 겨레가 하나 되는 평화통일을 위하여 선생의 온 몸을 던져 평생을 싸워 오셨던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위대하고 숭고한 삶이야 다시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극악으로 치닫던 1975. 8. 17 선생께서 그토록 이루고자 하셨던 것 중 반쪽짜리 쭉정이 독립만 이루어 놓으시고 나머지는 어느 것 하나도 이루어 놓지 못하시고 조국과 겨레를 향한 단심(丹心)을 졸지에 접으시고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시어 돌베개에 몸을 누이셔야만 했습니까?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던 선생께서는 2011년 36년간 잠들어 계시던 묘지의 흙을 박차고 다시 세상으로 당신의 몸을 들어내시어 내 죽음의 배후를 밝히라는 겨레를 향한 피맺힌 절규를 하셨습니다. 선생을 그렇게 졸지에 죽음에 이르게 한 검은 배후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생의 사인의 배후를 밝혀내는 것이 친일과 군부독재로 더럽혀진 현대사를 대오광정 하는 첫 걸음이기 때문에 선생께서는 다시 세상에 당신의 육신을 드러내지 않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선생께서 그토록 졸지에 가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야 선생을 타살토록 사주한 검은 배후와, 선생을 타살 후 추락사로 가장한 타살범과, 검은 배후의 딸과, 5천만 겨레와, 하늘과 땅과 산천초목이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진실은 휘두르는 총칼과 군홧발에 짓밟혀 꽁꽁 묻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이 타살로 그렇게 졸지에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현대의학에 의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지, 이미 5천만과 검은 배후의 딸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을 현대의학에 의하여 재확인을 하는 절차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마저도 박종철 열사가 경찰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것을 물고문에 의해 죽였다고 밝혀낸 것과 같이 용기 있는 법의학자가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더러운 역사의 반복이란 말입니까? 
선생이 타살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야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지만, 검은 배후와 타살 범을 찾아내는 것은 다시 검은 배후의 딸의 손에 결정권이 쥐어졌으니 이 무슨 역사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선생의 타살배후와 타살 범을 명쾌히 밝히지 못한 채 선생을 다시 돌베개를 베워드려 모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겨레장이 2013. 3, 28부터 시청광장에 분향소를 마련하고 엄수되었습니다. 

분향과 조문을 받은 3일간 수많은 시민들이 조문을 했지만,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야 할 민주당에서조차 의원 개개인의 조문만 있었고, 정권을 쥐고 있는 새누리당의원은 단 한 사람도 조문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필자가 그 자리에서 3일간 계속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확실하게는 모르겠으나 밤샘을 하며 분향소를 지킨 어느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새누리당의원이 조문을 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선생의 유골에서 타살한 흔적이 명백한 유골의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 바로 “타살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짧은 개인성명을 발표한 의사출신의 전 국회부의장 정의화의원의 썰렁한 화환하나가 집권여당에 몸담고 있는 저들이 선생의 분향소에 표시한 유일한 흔적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3.1절이나 8.15광복절 기념식에서는 강제동원이라도 된 듯이 얼굴을 빽빽하게 내밀고 침을 튀겨가면서 “독립선열들의 유지를 받들자!”는 헛소리를 앞 다투어 해대고 있습니다. 

그들이 유지를 받들어야 할 독립선열들은 이완용, 박정희, 정일권, 백선엽, 김창룡 ․ ․ ․ ․․ 등 등 인가봅니다. 

아-! 어떻게 역사가 이렇도록 더럽게 흘러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저들은 어찌하였던 뜻있는 시민들과 장준하선생의 유지를 받들려는 기념 사업회에 의해 선생의 겨레장은 엄수가 되었습니다. 

희뿌연 안개에 가렸던 해도 선생이 영결식을 치르는 09시쯤부터는 시청광장에 밝은 햇살을 내려쬐기 시작했습니다. 

선생의 유해는 장준하선생께서 일본군을 탈영하여 중국대륙 장장 6천리를 장정하던 때의 나이와 같은 젊은이들에 의해 태극기에 휩싸인 선생의 유골이 안치된 관을 운구하여 영구차에 모시고 시청광장을 한 바퀴 돌아 광화문 4거리로 서서히 나아갔습니다. 

선생의 운구행로를 서소문으로 고집하던 경찰도 염치가 있었던지 광화문으로 향하는 선생의 앞길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운구차 뒤로 펄럭이는 수많은 만장이 따랐고, 그 뒤를 시민들이 따랐습니다. 펄럭이는 만장은 아직도 친일후예의 독재에 허덕이는 국민들을 두고 가실 수밖에 없는 선생의 넋의 흐느낌과 몸부림이었고, 뒤들 따르는 시민들은 이 땅에서 친일의 찌꺼기를 쓸어낼 최후의 광복군들이었습니다. 

광화문에서 조선총독부자리의 검은 배후의 딸을 향하여 선생의 넋은 “무조건 국민 앞에 무릎을 꿇어라!”고 호통을 치신 후 서(西)로 방향을 꺾어 경교장으로 향했습니다. 

선생께서 중경임시정부부터 환국하여 이승만에 의해 암살을 당하실 때까지 비서로서 주석으로 모셨던 백범선생과 작별을 하신 후 서대문형무소 자리에서 선생이 박정희에 의해 옥고를 치렀던 감옥 앞에서 노제를 지낸 후 수많은 독립영령들과 작별을 한 후 뒤따라 왔던 시민들과 작별을 하고 선생의 영원한 유택인 파주로 향했습니다. 

버스 5대와 수많은 개인 차량이 선생의 운구행렬 뒤를 따랐습니다. 운구행렬이 자유로에 접어들어 한강을 끼고 북으로 달려갈 때 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뿌릴 것 같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파주 시장(이인재)이 전 파주시민의 뜻을 모아 기증을 한 장준하공원 부지 내에 선생의 유택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파주시에서는 돌에 선생의 처절했던 일대기를 새긴 돌비석을 여러 면 세우고 묘지에 오르는 앞길에는 검은 돌을 다듬은 돌베개를 놓아 공원을 잘 조성해 놓았습니다. 

선생께서 영면에 드실 그 공원에 이르자 이곳이야 말로 선생의 유택으로 쓰이기 위해 지구라는 땅 덩어리가 생겨난 뒤로 수십 억 년을 기다렸던 바로 그런 장소 같았습니다. 

선생의 유택에서 자유로 건너에는 바로 북녘 땅을 바라보는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자리를 잡고 있고, 오두산과 옆의 봉우리 간에 놓여 있는 고가도로 너머로는 선생께서 그렇게도 그리워하셨던 북녘 산하가 빤히 바라다 보이고, 그 앞에서는 북녘 땅을 흘러온 임진강과 서울을 가르고 흘러온 한강이 하나가 되어 큰 한강을 이루어 서해바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국토는 갈리고 철조망이 쳐져 있었지만 남과 북을 흘러온 물은 그 앞에서 자연스럽게 통일을 이루어 하나의 한강이 되었습니다. 비록 땅은 갈라졌어도 물은 통일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선생의 유해를 안장할 묘지에 올라보니 절로 탄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곳이 선생의 영면을 위해 하늘의 섭리가 이 땅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곳을 빼놓고 선생을 모실 곳이 그 어디란 말입니까? 
그 땅은 수십억 년을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땅은 주인을 만났고, 선생은 선생의 영원한 유택을 만나신 것입니다. 

영결식장의 맨 앞에 앉아계신 이미 90을 넘으신 생존 독립유공자분들께 큰 절을 올리고 필자가 저도 모르게 감격을 하여 “이제 통일은 한 걸음 성큼 다가섰습니다. 이 앞에서 남북의 물이 합쳐 하나가 되듯이 장준하선생께서 반드시 통일의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하고 말씀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의 넋은 하늘에서 돕고, 통일을 이루어야 할 무거운 짐은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뜻은 하늘과 독립영령들이 주관하시고, 이 땅의 일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생의 유해는 안장되어 통일된 한강과 남북 산하를 굽어보시고 계십니다. 

안장식이 다 끝나고 임시차량에 마련된 부엌에서 선채로 점심밥을 받아 식사를 끝내고 뒷정리를 다 마칠 즈음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어찌 자연스런 기상의 변화이겠습니까? 

선생의 운구행렬이 자나는 연도변의 수많은 시민들이 눈시울을 붉혔고, SNS를 통하여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장엄한 장례모습을 지켜보는 전국의 5천만 국민이 흐느꼈고, 수십억 년을 기다린 끝에 임자를 맞은 땅이 기쁨의 신음을 토해냈고, 마침내 감격한 하늘마저도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와 몇몇 가족과 뜻있는 시민들은 공원 한 귀퉁이에 천막을 치고 3일간 시묘(侍墓)에 들어갔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또 그 곳에 가서 뒤 소식을 전해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방송매체와 언론에서는 마지못해 겨레장이 치러졌다는 내용만 간략하게 보도하니 둔탁한 제 글로 그 현장의 모습을 이렇게나마 전해 드립니다. 

선생님이시여! 
감히 “영면에 드시라!”는 말씀조차 올릴 수가 없나이다. 빠른 시일 내에 선생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세상 하나하나 이루어 질 단계 단계마다 선생님을 찾아 그 자랑스러운 결과를 여쭙겠나이다. 

다만 60반평생을 헛되이 넘긴 제가 “평화통일”이라는 최후의 보고까지를 올릴 수 있을지는 저도 자신을 못 하겠습니다. 저희가 나태할 때 마다 선생님께서 엄한 채찍을 내려쳐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가 독자들에게 알리는 말씀> 

장준하선생님의 묘지를 찾아가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자유로~오두산 통일전망대 까지는 다 아실 것입니다. 
자유로만 계속 따라가면 통일전망대를 지나쳐 문산으로 향하게 됩니다. 
자유로를 따라 가다보면 <파주출판단지>나들목이 나옵니다. 

거기서 우회전해서 자유로를 벗어나 한 200미터쯤 직진했다 유턴(U-Turn)을 하신 후 다시 자유로 옆의 일반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장준하공원이 나옵니다. 

공원 위쪽으로는 <고구려박물관>이 있고, 장준하공원과 통일전망대는 자유로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통일전망대를 가시는 분들은 반드시 장준하공원에 들러 선생께 큰 절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묘지를 찾은 사람이 많을수록 통일은 앞당겨 질 것입니다.


                                                                               서울의 소리 글쟁이 꺽은 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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