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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익균 선생님~ 이제 편히 잠드소서.

통일문제는 독립운동의 연장이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3/04/10 [18:11]

구익균 선생님~ 이제 편히 잠드소서.

통일문제는 독립운동의 연장이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3/04/10 [18:11]
4월 8일에 돌아가신 구익균 선생에 대해 글을 하나 썼습니다.

남북 관계는 끝없이 대결로 치닫고 있고,
국내정치는 대통령 선거 공약과는 달리 제대로 ‘준비되지도 않은’ 이 현실에서
"실력 없는 정치인, 협잡하는 정치인이 많다는 게 문제이며,
다툼이 아닌 남북 협상을 통해 통일을 펼쳐가야 한다"는
선생의 말씀이 더 절절이 다가옵니다. 

안타깝게도 과거 사업을 하면서 세금 체납으로 집행유예형이 있어서 그러하다 합니다. 

독립유공자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너무나도 가혹합니다.
결국 4월 10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하시고,
결국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을 한 후 시립 납골당에 모셔졌답니다.
제가 듣기로는 이번에 대전 현충원에 먼저 돌아가신 부인과 합장을 하려고
시신을 이장해 왔다는데 그 부인의 시신마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평생을 독립운동, 혁신정당운동, 통일운동을 하시다가 잠드신 구익균 선생. 

 이제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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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절 1908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구익균 선생.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을 따라 이 산 저 산으로 다니면서 만세를 불렀었다고 한다. 신의주보통고교를 다닐 때 일제 노예교육반대, 일제통치반대 학생운동 주도. 더불어 평안도 사람의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면서 사회주의를 익혔다.

선생은 결국 1929년 상해에 도착해 독립운동 일선에 뛰어들고자 하였다. 당시 일본 첩자들이 많아 보통 의심을 많이 받았는데, 신의주보고 시절 항일운동 경력 덕분에 바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열혈 청년 구익균은 상해 독립운동가들의 편협한 사고와 얕은 사상적 인식 등에 크게 실망을 했었다. 이후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고 도산의 정치, 경제, 교육 평등사상이 본인의 사회주의 사상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고 도산의 비서가 되었다. 그러면서 흥사단 상해지부에서 월 2회 사회주의 강좌를 진행했으며, 상해 출입 한국인을 조사하여 독립운동에 참가시키는 운동을 해나갔다. 또 영어, 중국어, 일본어에 탁월했고, 1933년부터는 중국 광동 중산대학의 교수로서 혁명 운동가를 양성하였다. 

청년 구익균은 도산의 지시로 <대독립당> 비밀정당을 추진하였다. 1930년부터 이념과 지역적 분파를 초월해 안창호, 이동녕, 최동오, 조성환, 김두봉, 김원봉 등 항일 단일투쟁을 위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뭉쳤다. 그러나 1932년 4월 29일 상해 윤봉길 의사 의거 날에 도산은 피체되었고, 이후 대독립당의 정신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구익균 옹의 자서전을 보면 당일 아침, 흥사단 상해지부 사무실에서 도산 선생이 본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냐고 여러 차례 물어봤다며 이후 생각해보니 도산은 백범으로부터 윤봉길 의사 의거를 미리 전해들은 것 같다고 하기도 하였다. (당시 5일에 한 번씩 백범이 도산을 찾아와 군자금과 자문을 구하고 갔다고 함)

이후 선생은 국내외에서 세 차례에 걸쳐 체포되었고, 당시 부인은 일본 경찰에 인질로 잡히면서 정신병에 걸려 죽기도 하였다. 해방 직전 무역상으로 큰 돈을 벌었던 선생은 광복 직후 백범으로부터 상해 교민단장에 임명되고 본인 돈 60만 달러를 들여 돈이 없어 가난했던 학도병 탈주병 100명, 교민 2,000여명을 환국시켜 주었다. 선생의 자서전을 살펴보면 약산 김원봉과 친분이 두터워 약산의 요청을 받고 백범에게 약산을 당시 독립운동가 고국 환송단에 넣어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최종적으로 거절당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선생은 상해에서 교민 환국 활동을 마치고 1947년에 입국하여 진보당, 통일사회당 등 정치활동을 하였다. 이승만의 회유와 포섭이 있었지만, 이승만을 반대했기에 흔들리지 않고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남북 통일과 민주사회주의 활동에 주력하면서 반공법 반대, 한반도의 영세 중립국 통일을 주장하였다. 그러다 결국 5.16 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소에서 북한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선생은 1991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코리아중립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남북의 평화통일운동을 국제적으로 펼치기도 하였고, 2006년도부터는 99세의 노구로 도산 안창호 혁명사상연구원 이사장으로도 활동을 하였다. 또 반갑게도 2011년에는 49년 전 혁명재판소에서 반국가세력으로 처벌 받았지만, 이제 새롭게 무죄를 선고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반가움도 잠시 애석하게도 구익균 선생이 4월 8일 별세하였다. 치열했던 105년의 삶을 정리하고 끝내 염원이었던 통일을 보지 못하시고 눈을 감으셨다. 2년 전 대학생들과 선생을 찾아갔을 때 104세의 선생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말씀하셨다. 다툼이 아닌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운동을 해야만 한다고. 자기 중심적으로,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위한 활동을 해서는 안 되며, 어렵지만 부정에 반대하고 옳은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강조하셨다. 더불어 당신이 꿈꾸었던 새 나라에 대해서는 계급이 타파되고 부익부 빈익빈이 없는 사회, 스위스나 스웨덴 같은 나라를 꿈꾸며, 정치, 경제, 교육의 제한이 없는 곳이라고 하셨다. 

선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떠나셨다. 평생을 독립운동, 혁신정당운동, 통일운동에 힘쓰셨던 선생. 크게 보면 사람은 정치의 틀 안에서 살게 되어 있다며, 다만 실력 없는 정치인, 협잡하는 정치인이 더 많다는 게 문제라는 선생. 남과 북이 끝없이 대결로만 치닫는 지금, 3년 전 MBC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하신 이 말씀이 계속 맴돈다.

“통일문제는 독립운동의 연장이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글쓴이 - 이현정
http://www.yka.or.kr/html/communication/freeboard.asp?no=10642&page=1&size=10&sword=&skey=&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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