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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 총장의 주장과 '유서대필 조작사건'

악마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수가 있는가

김제영 소설가 | 기사입력 2015/05/24 [17:30]

박홍 총장의 주장과 '유서대필 조작사건'

악마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수가 있는가

김제영 소설가 | 입력 : 2015/05/24 [17:30]

 

▲ 소설가 김제영 선생  

문화부와 교통부가 공동주최한 '91우정의 문화열차' 행사때였다. 이어령 문화부장관의 부탁으로 충청도 자연미술인 이응우(공주), 정창훈(청주), 안의종(연기), 고승현(공주)를 독려, 그들의 설치작품으로 천안역을 꾸며준 일이 있었다.

 

예정된 천안의 프로그램이 끝나고 그 열차의 주목받는 승객이라 할 수 있는 인기작가 박범신, 김홍신, 조선작 그리고 원로 미술인 이승택씨가 함께 가자고 나를 끌어 당기었다.

 

분단상황에서는 최북단, 철마가 녹이 슨채 버려진 문산역 임진각에서 통일을 기원하는 발대식을 갖고 경부, 호남, 전라, 경전, 중앙선을 연결, 전국의 주요기차역에서 그 고장 예술인들과 합류, 4박5일간(91년 10월 28일~11월 1일) 전 국토를 순회하고 청량리역에서 해산하는 예정이었다.

 

군사정부이기는 하지만 동료문인 장관이 펼치는 뜻있는 문화정책의 일단이었기에 쾌히 참여를 했고 특히 청량리는 유년기에서 소녀기까지 내가 자란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고장이다. 어찌 그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싶다는 유혹이 느껴지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누가 서울에서 동승하였느냐고 물었다. "박홍 서강대 총장입니다". 솔깃했던 내 욕망은 천리만리 도망을 쳤다. 박홍 총장으로 인하여 기차여행의 여수에 젖어보려던 내 달콤한 심정은 어름덩이가 되어 내 등살을 찍어 눌렀다.

 

도대체 누가 죽으란다고 죽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 있단 말인가. 수명을 연장하려는 인간의 안간힘을 유독 박홍 총장만 모르고 있단 말인가."...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 한 인간의 죽음 앞에 이런 망언이 있을 수 있을까.

 

1991년 당시 故 김기설씨가 남긴 유서와 강기훈씨의 자술서(사진/노컷뉴스)

김기설씨 분신 자살과 강기훈씨의 소위 유서대필 사건을 떠올릴 때면 박홍 총장의 음산하고 근육질적인 모습이 떠올라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박홍 총장과 같은 기차를 타고 악수를 나누고 희희덕거릴 수는 없었다.

 

급기야는 그가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 그 뒤에는 사노청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고 장담한 박홍은 점입가경으로 "북 장학금으로 대학교수가 된 예가 있다"고 외국신문(일본 每日신문:한국일보 보도)에 까지 나팔을 불어댔다.

 

더욱 가관이고 꼴불견인 것은 그의 돌출성 망동을 용기라고 떠들어대는 언론의 무지와 교수들의 박홍 발언 지지 성명이다.

 

겉보기에야 제법 의롭고 의젓하다. 그러나 접시물보다 얕은 그들의 시국관은 뭇 남녀의 시선을 자극하고 있는 가랑이 밑이 터진 여인의 유행성 스커트만도 못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진심에서 박홍의 발언을 용기라고 생각하는가.

 

진보세력에 가해지는 펀치이기만 하면 맹복적으로 좋아서 손뼉을 쳐대지만 박홍의 발언이 어렵게 탄생한 문민정부에 어떠한 칼집을 내고 있는지 앞뒤를 재보기나 하였는가. '문민, 문민 보라구 안기부니 경찰 정보부니 모두 허수아비라구', '다 같은 통속이지 뭐', '오죽하면 대학총장이 발 벗고 나섰겠남' 국민의 여론과 문민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언론은 감지도 못하였단 말인가.

 

의도적이었던 무식의 소치에서였건 박홍의 발언이 문민정부에 끼친 파괴력은 시종 같은 색깔의 주장이기에 누구에게나 식별이 가능한 소위 주사파 학생들 보다 수 백배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고나 추켜 세우고 있는가.

 

또한, 사회적 경륜이나 글의 실력으로야 내가 따를 수 없겠지만 그리고 예리하고 재치있고 명석한 필봉으로 독자에게 영향력이 큰, 기대되는 내 후배이기에 한국일보의 장명수 편집위원에게 나이를 먹은 선배로서 한마디 하겠다.

 

'박홍 총장의 용기'라는 7월 20일자 칼럼에서 '대학총장들은 지금까지 학생운동의 진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기피해왔다. 그들은 '폭탄' 옆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폭탄'이라고 사회에 알려주지 않은 애매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장명수위원, 그대는 진정 학생운동의 중추역이었던 주체를 '폭탄'으로 간주하였는가. 개인의 영달과 향락에 빠진 다른 젊은이들이 사회의 도덕과 질서를 문란하게 할 때, 민족의 앞날을 우려하여 내 한 몸 돌보지 않고(방법에 잘못이 있었는 지는 모르지만) 통일을 성취하려 자신을 불태우고 있음이 민족에 위해한 폭탄이란 말인가.

 

대학의 총장들은 학생운동이 자생할 수 밖에 없는 이 나라 근대사의 배경을 분석하며, 로마에 사는 한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는 소시민의 연약성을 고민하고, 분단상황의 조국의 고통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 양식있는 지성인들 일 수 있지 않을까.

 

전국의 대학총장들에게 박홍과 같은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고 학생들 눈치나 살피는 졸부로 매도하였음은 언론의 횡포, 언론의 오만이 아닐런지... 박홍 총장의 주장이 새 까먹는 소리냐 아니냐가 중요한게 아니다. 사제에게는 사제의 길이 있고 대학총장에게는 총장의 길이 있다. 공안부나 안전기획부의 소관을 가로채 떠벌리는 총장을 영웅으로 미화하지 말라.(후략/미술세계 1994년 9월호)

 

후기 - 악마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수가 있는가

 

24년만에 자신의 결백을 밝혀 냈지만 간암에 걸려 또다시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강기훈씨(사진/SBS)

강기훈씨는 법원으로부터 국과수의 필적 감정결과와 정황에 따라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받고 1994년 8월 17일 만기 출소한 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검찰, 사법부와의 치열한 싸움을 시작하였다.

 

사건 발생 16년 만인 2007년 11월 13일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제58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였다.

 

2012년 대법원의 재심이 개시되었으며, 2014년 2월 13일 재심 판결에서 서울고등법원은 당시 검찰이 제시한 필적 감정이 신빙성이 없으며, 유서 대필 및 자살 방조에 대해 무혐의·무죄로 재판결하였다. 검찰은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2015년 5월 14일 24년만에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확정했다. 그러나 강기훈은 법정에 나오지 못했다.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의 병이 돼 간암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의 생명이 얼마나 유지될지 가슴이 미어진다.

 

당시에 그 필적을 비교해 보면, 강기훈씨의 필적은 초등학교학생들도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김기설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목격자 등 직접적인 증거도 없이 사법부는 그를 투옥했다. 악마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수가 있는가?

 

이 사건은 형법상 자살 관여죄에 대한 대법원 판결 가운데 실제로 죄로 인정된 유일한 판례였으며, 1890년대 프랑스에서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필적 때문에 석연찮게 반역죄로 몰려 종신형을 선고받자 에밀 졸라 등 당대 지식인들이 옹호하고 나섰던 것과 비유되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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