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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언론 공개 '괌 체포' 법조인 얼굴, 한국언론은 왜 가렸을까?

"용기 있는 기자만 정상적 기사를 쓸 수 있는 나라에선 언론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7/10/07 [15:57]

美언론 공개 '괌 체포' 법조인 얼굴, 한국언론은 왜 가렸을까?

"용기 있는 기자만 정상적 기사를 쓸 수 있는 나라에선 언론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7/10/07 [15:57]

추석 연휴 동안 화제를 모은 뉴스 가운데 하나는 괌에서 체포된 한국 법조인 부부 소식이었다. 현직 판사인 아내와 일급 로펌 변호사인 남편이 두 아이를 차 안에 방치한 혐의로 괌 현지에서 체포됐다는 뉴스가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한동안 장악했다.

 

괌 현지 언론사 퍼시픽뉴스센터에 따르면 지난 2일(현지시간) 변호사 A(38)씨와 판사 B(35·여)씨 부부가 경찰에 연행됐다. 이들은 각각 6살 난 아들과 1살 짜리 딸을 K마트 주차장에 정차된 차에 방치, 아동학대 등의 혐의를 받았다.

 

미국에서는 6세 이하 아동을 8세 이상 또는 성인의 감독 없이 차량에 방치할 경우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다. 이 부부는 어떻게 됐을까. 법정에서 아동학대 혐의는 기각되고 경범죄로 벌금형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들은 각각 2000달러(약 230만원)을 내고 조건부로 풀려났다. 

 

한국언론은 왜 '괌 체포' 법조인 부부 얼굴 가려야 했을까?

 

 

이 뉴스가 관심을 끈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두 사람의 경력, 법조계에선 예전부터 유명했던 부부의 뛰어난 개인적 자질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쇼핑몰에 들어갔다 나온 시간이) 3분 정도에 불과하다."라고 남편이 말했다는 현지 언론 보도가 논란을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애당초 이슈가 커지게 된 것은 두 사람의 체포장면 동영상과 유치장 수감 당시 촬영한 사진(이른바 '머그샷')이 현지 언론에 의해 모자이크 없이 생생하게 보도됐기 때문이다. 구글과 유튜브,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으로 전세계가 연결된 지금 현지 언론이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과 기사를 국내 웹 이용자들이 찾아보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SBS에 취재수첩에 따르면 이 뉴스를 보도한 거의 모든 국내 언론사는 현지 미국 언론이 이미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한 두 사람의 얼굴과 실명을 가린 채 보도했다. 동영상은 사용하되 두 사람의 얼굴은 가렸고, 현직 판사와 로펌 변호사라는 직업은 공개하되 두 사람의 실명과 신원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표현은 삼갔다. 

 

그렇다면 국내 언론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어떤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상식이 있는 미국 언론은 거리낌 없이 두 사람의 신원을 공개하는 것이고, 판사나 변호사의 영향력을 무서워하는 국내 언론은 두 사람의 신원을 애써 보호해주는 것일까? 국내 언론이 신원을 공개하지 못한 것은 국내법과 대법원 판례가 그런 보도를 사실상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 이런 법과 판례가 자리 잡게 됐는지 지금부터 살펴보겠다.

 

국내 언론도 범죄 피의자의 실명과 얼굴을 생생하게 보도하던 때가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여론 형성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간지들은 범죄 피의자 실명을 한자(漢字)까지 정확히 보도했다.

 

 

다음은 1980년대에 벌어진 폭력 조직 사이 유명한 난투극인 '서진 룸살롱 사건'에 대한 경찰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보도한 기사 사진이다.

 

실제 당시 기사에는 이 글에서 00으로 표시한 부분에 모두 실명이 적혀 있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비실명 처리해서 보도했을 기사다. 여러 명을 김 모 씨, 이 모 씨라고 부르다 보면 헷갈리니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범죄 피의자의 이름을 한자까지 "용기 있게" 지면에 실었던 한국 언론이 언제부터 바뀐 것일까.


1998년 대법원 판례가 실명·얼굴 보도 원칙 바꿔

 

전환점이 된 것은 1998년에 나온 대법원 판례다. 1990년 서울 서초경찰서에서 일어난 사건이 발단이었다. 서초경찰서는 1990년 5월 남편과 이혼 소송 중이었던 여성 A씨 등 2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남편을 살해해 재산을 상속 받기 위해 계획을 꾸민 뒤, 남편의 친한 친구를 유인해 감금한 뒤 남편의 소재를 대라며 마구 폭행한 혐의였다.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1990년 8월 1일 서초경찰서 형사계장 등은 구속영장을 신청하기 전 당시 서초경찰서 출입기자들에게 "굵직한 사건을 해결했다"며 취재를 요청한 후 관련 자료를 공개했고, 당시 주요 일간지는 물론 한 지상파 방송사에도 이 사건과 관련 기사가 피의자들의 얼굴 모습과 함께 보도됐다. 이후 피의자 2명에 대한 구속영장은 발부됐지만, 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그리고 피의자 중 1명인 A씨는 이 사건과 자신의 얼굴 모습을 보도한 언론사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대법원은 이 보도가 잘못됐고 공공성이 크지 않다고 판결했다. 이후 대한민국 모든 언론사의 모자이크와 비실명 보도의 기준이 된 이 판례의 유명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의 범죄 사건 보도는 범죄 행태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사회적 규범이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위반하는 경우 그에 대한 법적 제재가 어떻게, 어떠한 내용으로 실현되는가를 알리고, 나아가 범죄의 사회 문화적 여건을 밝히고 그에 대한 사회적 대책을 강구하는 등 여론 형성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믿어지고, 따라서 대중 매체의 범죄 사건 보도는 공공성이 있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 자체를 보도하기 위하여 반드시 범인이나 범죄 혐의자의 신원을 명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고, 범인이나 범죄 혐의자에 관한 보도가 반드시 범죄 자체에 관한 보도와 같은 공공성을 가진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중략) 평범한 시민으로서 어떠한 의미에서도 공적인 인물이 아닌 이상 일반 국민들로서는 피고 언론 각사가 적시한 범죄에 대하여는 이를 알아야 할 정당한 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그 범인이 바로 A와 B라고 하는 것까지 알아야 할 정당한 이익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출처 : 대법원 1998. 7. 14. 선고 96다17257 판결[손해배상(기)] > 종합법률정보 판례)

 

간단히 요약하자면 대법원은 범죄의 내용에 대해서 보도하는 것에는 공공성이 있지만 범죄 피의자의 신원에 대해서 보도하는 것은, 범죄 피의자가 공적인 인물이 아닌 이상, 공공성이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즉, 범죄 피의자의 신원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보도하더라도 언론사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례가 확립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괌 체포' 법조인 부부의 경우를 이 판례를 대입하면, '아이를 자동차 안에 방치한 혐의로 법조인 부부가 체포됐다'는 범죄 혐의 내용에 대해 보도하는 것은 공공성이 있지만, 두 사람을 공적 인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의 신원과 얼굴 모습을 보도하는 것은 위법 행위가 되는 셈이다.

 

실제로 이 판례가 확립된 후 언론사들은 범죄 피의자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는 것을 삼가게 됐다. 얼굴이나 신체 일부를 모자이크 처리했더라도 범죄 피의자나 신원 공개를 원하지 않는 인터뷰 대상자의 신원을 주변에서 특정할 수 있는 장신구 등이 화면에 노출될 경우에도 방송사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언론중재위원회 결정도 나온 바 있다.

 

2011년 11월 국가인권위가 "체포 및 이송 과정에서 부득이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피체포자의 수갑이 타인에게 노출되어 인격적인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수사기관 등에 권고한 이후부터는 체포된 피의자의 수갑이나 포승줄을 모자이크 처리하는 것까지도 주요 방송사의 보도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사실을 보도해도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나라


더구나 우리나라 법은 사실에 근거한 실명 보도에 대한 언론사의 책임을 민사적 손해배상에만 한정하고 있지 않다. 언론사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더라도 형사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형법 307조 1항, 이른바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조항 때문이다.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누군가 범죄 혐의로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는 것을 언론사가 보도하는 것은 "사실 보도"다. 그러나 동시에 범죄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사실'이다. 때문에 우리나라 법에 따르면 범죄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사람의 실명이나 얼굴 모습을 공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형사 처벌 대상이 된다.

 

물론 사실을 적시한 명예훼손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 사실이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할 때에 처벌하지 아니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이른바 '위법성의 조각'이 명시된 형법 제310조다. 그러나 문제는 다시 앞서 언급한 1998년 대법원 판례로 돌아온다. 이 판례에 따라 우리나라 법원은 '범죄의 내용'에 대해서 보도하는 것에는 공공성, 즉, 공공의 이익이 있다고 보지만, 공인이 아닌 범죄 피의자의 신원과 얼굴모습을 보도하는 것에는 공공성이 없다고 판단한다. 때문에 만약 범죄 피의자가 '공인'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며 범죄 피의자의 신원과 얼굴 모습을 보도하는 것은 형사처벌을 받는 범죄가 된다. 이것이 바로 "용기 있는" 미국 언론과 달리 한국 언론이 공인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범죄 피의자의 실명과 얼굴모습을 공개하지 않는 진짜 이유다.

 

용기 없는 기자도 '호부호형' 할 수 있기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홍길동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언론사에 종사하는 기자 대부분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민이다.

 

'공공의 이익'에 관해서는 형사 처벌을 면해주겠다고 보장하고 있으나, 구체적 케이스에 대해 해석을 하는 판사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으니, 매일 사건과 부딪히고 시간에 쫒기는 기자들과 데스크는 '남들 하는 것 보고 따라가자'는 식의 소극적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비판의 상대가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고 법적 소송에 막강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재벌이나 권력기관이라면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SBS 취재파일 임찬종 기자는 "용기 있는 기자라면 그런 모든 난관을 뛰어 넘어 공공의 이익에 대해서 과감한 실명 보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 있는 기자만 정상적 기사를 쓸 수 있는 나라에선 언론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용기 없는 기자도 김 모 판사, 이 모 검사, 박 모 前 사장을 를 김00, 이 00, 박00 이라고 쓸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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