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자유총연맹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라!' 청와대 청원독재자 이승만은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친일민족반역자이자 이기도 하다.친일반민족자 이승만이란 자를 사대수구들은 건국의 아버지라 하며 대한민국의 국부로 받들어 모시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23일 한국자유총연맹 입구 서 있는 이승만 동상을 철거해 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자는 "이미 이승만은 국적을 일본이라 한 일본인이며, 임시정부 때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었지만 워낙 더러운 자이라서 탄핵을 당해 쫓겨난 자이고, 6.25 때는 자신이 보살펴야 할 보도연맹원 수십만 명을 공산당이라 하여 무참히 죽이고, 대구까지 도망갔다가 대전으로 되돌아 와서는 녹음된 방송으로 수도 서울을 국군이 사수하고 있다고 사기를 쳐 무고한 생명 수천 명이 죄도 없이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독재를 하다가 4.19 혁명에 의하여 쫓겨난 자인데 이런 자가 한 일이 뭐 있다고, 본 받을 게 뭐 있다고, 한국자유총연맹 본부 입구에 동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이 친일 독재자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여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다시금 고취시킬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청원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 이승만의 동상을 철거해야 아는지 간단하게 나마 살펴 보도록 하자.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출생으로, 모친이 용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꿨다고 하여 아버지인 이경선이 승룡이라 이름을 지었으나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가 폐지될 때까지 급제를 못하게 되자 숙부가 천천히 되라며 승만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설이 있다.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가 1904년 8월 9일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되었다.
1904년 11월 도미하여 1905년 2월에 조지워싱턴 대학에 2학년 장학생으로 압학하고 1905년 8월에 태프트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친일파인 일진회 대표로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였다.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인 간에 교제가 친밀하며, 농민들은 일인들을 환영한다.”는 망언을 하고 “한국에 이완용 같은 충신과 이토 히로부미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다.”라는 극언을 한 친일파 스티븐스(Stevens, D.W.)에 화가 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이 각각 암살을 시도하였고 먼저 간 전명운의 총탄은 불발되었으나 스티븐스를 죽이겠다고 육탄전을 벌리는 도중 장인환이 쏜 총탄에 의해 전명운도 총상을 입었고 장인환이 다시 두발을 더 스티븐스에게 쏴 가슴과 복부에 총탄을 맞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이틀 뒤 스티븐스는 사망하였다.
이승만은 이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하기도 하였다. 표면적인 거절 이유는 학생이라 시간이 없고 기독교인이라서 살인자의 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명운은 1908년 6월 28일 무죄로 풀려 났고 장인환은 25년의 금고형을 받았으나 10년 만에 출감하였다. 두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1903년부터 1905년 사이에 7,200여 명의 한인들이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의 호눌룰루 도착했다.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이민을 간 교포들은 1909년에 국민회를 조직해서 조선의 독립을 바라며 독립성금을 냈고 독립운동가 박용만을 초청해서 국민회 임원을 맡기고 소년병학교를 지원했다. 하와이에서 박용만은 조선의 독립은 무장투쟁 뿐이라면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했고, 공교롭게도 이승만을 초청한다. 당시 하와이는 미주지역 최대의 독립자금 조달처였다. 국민회에 돈이 많은 것을 안 이승만은 테러도 불사하며 폭력으로 국민회를 장악했고 한인사회는 분열되었다. 그 와중에 이승만은 국민회 재산을 상당수 강탈하였다.
임시정부는 3.1운동 직후인 3월 21일 수립된 노령 임시정부, 4월 10일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 4월 23일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 등이 있는데 이승만은 이 임시정부에서 다 요직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임시정부 규정에 없는 대통령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바람에 안창호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지만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는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였고 하와이를 본거지로 활동하던 그는 재미교포들이 걷은 성금을 개인적으로 써 버리며 탕진하고 임시정부에는 쥐꼬리만한 독립자금을 건네다가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탄핵을 해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백년전쟁 이승만' 편을 보기 바란다.
이승만이 저지른 반인륜적이며 반민족적인 행위를 열거해 보면 이승만은 1918년 미국의 징집서류에 자필로 국적을 일본(미국 국가기록원)이라 적었다.
국회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해체
제헌국회에서 정부수립을 앞두고 애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제헌헌법에 두었는데 이 조항에 따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였고 1948년 9월 22일에 공포되었으며 10월 22일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중앙청의 사무실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7,000여 명의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하고 친일파 체포 준비에 들어가서 3일 만에 해외로 도피하려던 화신백화점 총수인 박흥식을 제1호로 체포했다.
이 사이 1949년 1월 8일 서울시경 사찰과장실에서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 테러리스트에게 총과 돈이 건네지며 반민법에 적극적인 국회의원과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하여 특위위원을 38선으로 끌고 가 북한으로 월북하는 것으로 꾸며 살해하라는 지시였다.
이 사건은 테러리스트 백민태가 자수하면서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친일파들이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상대방을 빨갱이로 모는 행태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1월 10일에는 일제 밀정이었던 대동신문 사장 이종형을 체포하고 13일 독립선언 33인의 한사람이었던 최린, 21일에는 인촌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가 체포되었다.
1월 25일. 대표적인 친일 고문경찰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자 이승만의 반발은 노골화되기 시작한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리력을 담보로 하고 있는 경찰이 가장 든든한 배후세력인데 노덕술로 대표되는 경찰이 이승만의 수족이니 노덕술에 대한 애착을 표현을 안할 수가 없고 노덕술의 체포를 그냥두게 되면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이승만은 1월 28일 제14차 국무회의에서 ‘노덕술의 피검에 관해서는 그가 치안기술자임을 비추어 정부가 보증을 하여서라도 보석하도록 함이 요망되나 유죄시에는 처벌당함은 무방하다.’며 노덕술을 비호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는 2월 7일 친일문학의 거두였던 최남선, 이광수를 체포하고 방의석, 김태석 등 널리 알려진 친일파를 잇달아 체포하였다. 이러자 자수하는 친일파가 속출하고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제보가 뒤따랐다. 이에 대한 반발과 이승만의 비호를 받는 친일파들이 반민특위 사무실 앞에서 연일 시위를 하고 친일파들의 반공대회가 잇달아 벌어졌다.
1949년 5월 18일. 친일청산에 적극적이던 소장파 의원 이문원, 최태규, 이구수 3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름하여 국회프락치 사건의 시작이었다.
반민특위가 친일경찰이 배후에 참여한 관제데모의 배후로 서울시 사찰과장 최운하를 체포하자 위기감을 느낀 내무부 차관 장경근의 주도 하에 6월 6일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 아래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수사 서류를 압수하고 특경대원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전원 연행하였다.
1949년 6월 29일. 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다. 암살범 안두희의 배후로는 만주군 출신 장은산이 지목되었고, 체포된 안두희의 뒤를 김창룡, 전봉덕 등의 친일파들이 보살폈다.
국회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힘을 잃은 국회는 이승만에 의해 장악되었고 이승만의 독재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것이 지금까지 친일파들이 득세를 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수구들이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숙청하는 시작이 되었다.
한국전쟁과 이승만
제주 4.3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고, 6.25 전쟁이 터지자 이틀만에 일본 정부에 6만 명 망명의사를 타진했고(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보도연맹원 수십만 명을 학살하고 미리 대구까지 도망가서는 너무 멀리 도망간 것 같다고 하며 다시 대전까지 거슬러 와서는 녹음된 방송으로 국군이 수도 서울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허위방송으로 애꿎은 양민들이 무수히 죽고 고난을 당했다.
한강 인도교 폭파의 책임은 당시 공병감이었던 최창식 대령에게 떠넘겨 사형을 시켰고, 국민방위군 예산을 착복 횡령하여 아사, 동사, 병사한 국민방위군이 5만인지 10만인지 모를 정도였는데 이 자금이 이승만 세력에게 흘러들어간 정황이 포착되었음에도 국민방위군 고위 간부 김윤근 등 5명을 꼬리 자르기식으로 총살로 마무리 하였다.
전쟁의 와중인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인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백골단, 땃벌대 등의 폭력 조직을 동원하여 부산정치파동이라 부르는 짓을 해가며 1952년 정부여당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 야당의 의원내각제 개헌안 일부를 포함하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면서 헌정을 유린하였다.
6.25 동란 중에 이승만 정부의 무능으로 단 3개월만에 부산 부근의 낙동강 주변만 남기고 다 빼앗겼다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으로 밀고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하면서 다시 밀려 내려오고, 남과 북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피난을 못가고 살기 위해 점령군이 시키는대로 한 죄밖에 없는 사람을, 북에서는 북대로 남에서는 남대로 반동이라, 부역자라 하며 죽인 사람들이 그 얼마인가?
이후의 헌정유린
1954년 11월 27일. 이승만에 한해서만 3선 금지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헌법개정안이 표결에 부쳐졌는데 재적의원의 2/3인 136표에서 1표가 모자라는 135표 찬성으로 부의장인 최순주가 부결을 선포하였지만 203명의 2/3은 135.333이므로 반올림 하면 135이기 때문에 가결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11월 28일 야당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번복가결동의안을 상정하여 통과시키고 정부로 이송, 정부는 당일 공포함으로써 이승만이 영구집권을 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를 조롱하는 의미로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한다.
그 후 독재에, 부정선거를 하다가 4.19 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자가 이승만인데 권력을 좇는 기회주의자 친일파 이승만인 것은 그의 행적을 뒤져 보면 훤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짓거리를 한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 건국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수구들은 지금도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 빨갱이라 매도하며 종북좌파라고 부르짖으며 대한민국을 김정은에게 상납하려고 한다는 괴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정적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단하는 역사는 이승만 때부터 친일파들에 의해 조작되어 온 역사로써 친일반민족자인 이승만을 제대로 평가하고, 우선 한국자유총연맹 안에 있는 이승만 동상도 철거를 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독립유공자들의 원혼을 달래 주어야만 한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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