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권의 교육부가 홍명희의 장편소설 <임꺽정>을 교과서에 싣지 못하도록 했다는 게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그동안 <임꺽정>은 통일교육 자료로 활용되었고 일부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심지어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지문이 출제된 바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윤석열 정권 들어 소설 <임꺽정>이 ‘걱정거리’가 된 것일까? 윤석열 정권의 교육부는 2022년 1월 21일에 실시된 국정조사를 바탕으로 <임꺽정>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1)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 (2) 헌법 정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3) 교육의 중립성을 지키지 않았다. (4) 내용이 정확하지 않아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
그러자 2023년부터 발행되는 교과서에 소설 <임꺽정>이 사라졌다. 자유와 자율을 어느 정권보다 강조한 윤석열 정권이 교과서에 나온 소설까지 간섭하자 교육 종사자들은 물론 역사학자들까지 들고 일어날 태세다. 출범하자마자 노조 탄압, 언론 탄압, 야당 탄압에 열중하더니 이제 표현의 자유도 탄압할 모양이다. 윤석열 정권의 교육부가 <임꺽정>이 교과서에 실리기엔 부당하고 한 이유를 조족조목 반박해 본다.
(1)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임꺽정>은 무슨 학술 논문도 아니고, 신문 기사도 아니며, 창작물인 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을 두고 정치적 편향성 운운하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소설은 세상에 있을 만한 이야기를 작가가 상상력을 가미해 쓴 허구다. 물론 실제 인물을 소설로 형상화는 경우도 있지만 거기에도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실제 상황과 다른 경우도 나타난다.
윤석열 정권이 말하는 ‘정치적 편향’이란 이 소설의 작가가 광복 후 북한으로 간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윤석열 정권은 북한 작가의 소설을 우리 교과서에 싣는 것이 매우 불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면 정지용, 이용악, 백석도 6.25때 북한으로 갔으므로 교과서에 실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정지용, 이용악, 백석의 시들은 수능에도 가장 많이 출제된 바 있다.
정지용의 시 <향수> 같은 경우 우리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로 뽑혔고, 노래로도 나온 바 있다. 이용악의 <그리움>, 백석의 <고향>, <여승>, <나타샤> 등은 이미 수능에까지 출제된 바 있다. 따라서 단지 작가가 북한으로 갔다는 것만으로 그의 작품을 교과서에 싣지 못하게 한 것은 교육마저 이념으로 갈라치기 하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연설을 한 마당에 단지 작가가 북한으로 갔다는 이유로 교과서에 싣지 못하게 한 것은 그만큼 윤석열 정권의 의식이 아직도 7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방증이다. 허구인 소설이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2) 헌법 정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 주장은 더욱 기가 막힌다. 우리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고, 사상의 자유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소설 <임꺽정>이 무슨 헌법에 어떻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1948년을 건국의 해로 본 정권이 바로 윤석열 정권이다.
윤석열 딴에는 그 잘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 것 같으나, 그렇다면 왜 창작의 자유는 보장해 주지 않는가? 헌법에 영토란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북한도 우리 영토다. 따라서 작가가 북한으로 갔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3) 교육의 중립성을 지키지 않았다.
이 주장도 개가 웃을 일이다. ‘교육의 중립성’이란 말도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왜 소설 가지고 교육의 중립성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은 맞지만 소설이 교육의 중립성을 어겼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다.
윤석열 정권이야말로 교과서에 실린 소설이나 걸고 넘어졌으니 중립성을 어겼다. 이제 하다하다 교과서 속 문학작품까지 걸고넘어질 셈인가? 보나마나 극우 반공 단체가 그렇게 하도록 건의했겠지만 <임꺽정>은 소설이지 김건희가 쓴 박사 논문이 아니다. 박사 논문도 베껴 쓰는 세상에 소설이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면 정권이 ‘Yugi’되는가?
(4) 내용이 정확하지 않아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
이 주장도 헛웃음을 나오게 한다. 아니 소설 내용이 왜 실제와 같아야 하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소설이란 이 세상에 있을 만한 이야기를 작가가 상상상력을 가미해 창조해낸 허구다.
그런데 왜 거기에 정확성이나 공정성을 거론하는지 기가 막힌다. 윤석열은 혹시 소설과 역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긴 ‘맥아더 포고령’도 모르고 ‘탄소중립’과 ‘탄소중심’을 혼동한 사람이니 더 말해서 뭘 하겠는가? 속말로 ‘알아야 면장도 한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소설 <임꺽정>
더욱 웃기는 것은 <임꺽정>이 조선일보에 1928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연재되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표제는 연재 초기에 <임꺽정전 林巨正傳>이었으나 1937년 연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면서 <임꺽정>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형평성에 맞으려면 조선일보 창간도 역사 교과서에서 빼야 한다. 그 조선일보가 윤석열 정권의 일등공신이니 이 모순을 무엇으로 해명할 것인가? 혹시 윤석열은 <임꺽정>을 <윤걱정>으로 오해한 것 아닌가?
<임꺽정>의 시대적 배경은 16세기 중엽
홍명희의 장편소설 <임꺽정>은 시대적 배경이 조선시대다. 이 작품은 연산군 시대와 명종 시대에 이르는 16세기 중반 전후 조선 중기의 역사적 상황을 광범위하게 수용했다.
16세기 중후반, 봉건적 질곡을 뚫고 일어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임꺽정이다. 평민인 임꺽정은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응징해 ‘의적’으로 통했다. 이 작품은 하층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 근대 역사소설에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종래의 소설들이 대부분 왕조 중심에다 근거 없는 야사에 치중한 반면에 홍명희는 <임꺽정>을 통해 민중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탁월한 안목을 보였다. 소설 속에는 당시의 상·하층에 두루 걸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관습이 오롯이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도 높다.
소설 <임꺽정>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조선어는 가히 보물이라 하겠다. 소설 <임꺽정>은 일본어 번역투에 오염되지 않은 우리말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 내고 있다. 또한 반봉건적인 민중의 강한 생명력을 드러냄으로써 건강하고 낙천적인 민중 정서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 張吉山>이 그 맥을 이었다.
오히려 통일 교육 자료로 최적합
통일시대 남북의 작가와 독자들이 같이 심취하고 영향받을 수 있는 문학작품을 든다면, 바로 홍명희의 <임꺽정>일 것이다. 그 점에서 <임꺽정>은 통일시대 우리 민족이 지녀야 할 덕목이 들어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권이 <임꺽정>을 교과서에 싣지 못하게 한 것은 혹시 ‘21세기 임꺽정’이 나타나 정권을 뒤엎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으로 보인다. 윤석열 눈에는 노조나 촛불시민이 모두 ‘임꺽정’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하면 이제 곧 허균의 <홍길동전>도 교과서에서 사라지게 생겼다. 호부호형을 못해 반란을 일으킨 홍길동, 검찰 독재 정부를 독재정부라 못하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오죽 못났으면 소설 가지고 시비를 걸까? 잘 하면 김건희의 논문이 교과서에 실리겠다. 정말 빌어먹을 정권이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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