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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100년 이제는 세계인 우물에 독약을 뿌리는가

이득신 작가 | 기사입력 2023/09/02 [21:43]

관동 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100년 이제는 세계인 우물에 독약을 뿌리는가

이득신 작가 | 입력 : 2023/09/02 [21:43]

▲ 출처=연합뉴스  © 서울의소리

1923년 9월 1일은 관동대지진으로 혼란한 일본에서 자행된 조선인 대학살 100년 되는 날이다. 관동대학살(關東大虐殺)은 관동대지진이 있었던 1923년 9월 1일부터 약 3~4주에 걸친 혼란기 무렵, 당시 일본에 존재하던 조선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일부 일본인들이 재난을 틈타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유언비어를 퍼트려 제노사이드를 벌인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심지어 일본인들도 살해당하기도 했다.

 

재난에 따른 내부의 정치 사회적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를 선동,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고대 로마 대화재 당시 네로의 그리스도교 신자 박해와 비슷한 점이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본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는 혐한 감정과 재일교포들에 대한 증오 발언들만 보더라도 유사성이 나타난다.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일본 같은 지진이 잘 일어나지 않으니 일본인들보다 훨씬 당황하였으며, 일본인과는 문화와 언어도 달라서 소통도 힘들었다. 그러니 말과 문화가 통하는 조선인들끼리 모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은 이런 행위를 이상한 움직임으로 봤다. 그리고 계엄령이 내려진 뒤 군인들이 출동했는데 이것을 적을 '토벌'하는 행위로 인식했다.

 

1923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 신문은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한다.'는 기사를 전면에 실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관제 언론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사를 썼다. 1923년 도쿄를 위시한 간토 지방은 지진 때문에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속출했고, 치안도 무너져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인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편향적인 유언비어까지 더해진 결과, ‘사회주의자들의 교시를 받은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방화약탈까지 한다’ 는 과격한 선동 문구로 둔갑하여 각지에 나돌았다.

 

또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독이 든 만두를 나눠주고 있다’,  ‘조선인들이 일본에 지진 일어나게 해달라고 일본에 저주를 퍼부었다’는,유언비어라 하기에도 급이 너무 떨어지는 허무맹랑하고 비과학적인 낭설까지 나돌았다. 

 

이후, 일본 경찰이 조선인에 의한 방화가 이어져 계엄령을 내렸다는 식의 전보를 전국의 지방 조직에 보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장의 분노를 표출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증오가 있었던 일본인들은 이러한 소문들을 곧이곧대로 믿고, 서로 적개심을 확산시켜가며 조선인 학살의 구실을 쌓아갔다.

 

게다가 조선인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다른 민중들도 지진으로 인해 여기저기 무너지고 물 공급까지 끊긴 상태라 삶의 터전을 잃은 허망함과 좌절, 화재, 치안에 대한 불안감까지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흉훙한 소문들까지 나돌자 당장의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여 곳곳에서 일본인 우익들의 선동 하에 죽창, 몽둥이, 도끼, 갈고리, 일본도, 총기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을 빙자한 폭도들이 결성됐고, 이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민재판을 해 조선인이다 싶으면 가차 없이 죽였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현장에서 찌르거나, 때리거나, 찍거나, 베어 죽였다. 게다가 기름을 붓거나 장작불에 천천히 화형을 시키기도 했으며, 심지어 밧줄로 굴비 엮듯 묶거나 반죽음으로 만들어 강물에 던지기도 했는데, 직후 살겠다고 수면 위로 올라오면 그 즉시 쫓아가 확인사살을 했다.

 

게다가 창씨개명이나 화를 피해 일본식 이름과 복장으로 위장한 조선인들까지 잡겠다고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 「十五円五十銭(십오 엔 오십 전) (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 등의 단어까지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다 싶으면 살해하였는데, 이 때문에 지방 방언 등으로 발음이 어눌하거나 성이 金인 도호쿠 사람들, 외자 성을 강제당한 아마미 제도 출신, 부라쿠민 등이 반체제적 사회주의자나 조선인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재일 조선인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 피난에 가까운 귀국을 하였는데, 사태가 너무도 심각하여 부유한 상인들조차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귀국했을 정도다. 특히 집이나 토지와 같은 부동산은 아예 가져올 수가 없으니 급매 그런 것도 못 하고 귀국했는데, 사태가 진정된 후에도 일본으로 가는 게 쉽던 시절이 아니라 일본에 가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이 많았다. 

 

1923 관동대학살 100년, 근현대 세계사에서 자국의 자연재해로 흉흉한 민심을 돌리려 타국민을 학살한 황당한 제노사이드 관동대학살이 일어난 지 100년이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가 전부였다. 상해에서 발행한 임시정부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자에 발표한 6,661명이 제노사이드 당했다. 많게는 2만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현재까지 정확한 피해자 수에 대한 기록을 잘 한다고 알려진 일본 정부는 '검토중' 이라며 밝히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에선 1924년 9월 1일 전후 몇 군데에서 추도회를 치른 뒤 지금까지 관동대학살은 지워졌다.

 

100년 전, 당시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말로 조선인 학살의 구실을 마련했다. 100년후, 지금은 실제로 일본이 세계인의 우물인 바다에 직접 독을 풀어 세계인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 당장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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