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위기 상황으로 치달을 때, 야당의 역할은 국가운영의 정상화를 위한 조언을 해야 하고 그게 쉽지 않은 상황이라면 위기의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투쟁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당대표를 구심점으로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국가를 구할 생각보다 그러한 시기를 이용하여 국가의 몰락에 숟가락을 얹는 민주당 계열 정치인이 항상 존재해 온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수박이라고 불리지만 과거에는 사쿠라라고 불린 민주당 계열 정치인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철승이었다.
1976년 5월, 신민당의 전당대회가 열린다.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연임을 노리고 있었다. 이철승이 도전자로 나선다. 그저 평범한 전당대회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미 2년 전인, 1974년 당수 유진산이 사망한 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1976년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은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선명 노선을 내세웠다. 이철승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개혁에 동참하자는 공약을 내걸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격돌한 김대중은 이후 유신이 선포되면서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이미 1973년에는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을 박정희 정권이 납치한 후 바다에 빠트려 죽이려는 납치미수사건이 발생하여 전세계가 분노로 들끓었다. 이후 다시 일본 망명에서 돌아와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였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김승훈, 함석헌, 함세웅, 안병무 등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발표한 선언이었다. 이 선언이 발표된 사건을 3·1 민주구국선언이라 부르며,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은 구속된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김대중은 신민당의 전당대회에 참여하거나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김대중은 정치인이라기 보다 시민운동가에 더 가까웠다.
당시 이철승의 공약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공포정치로 치닫고 있는 유신시대에 동참한다는 것이 야당총재에 도전하는 자의 정상적인 공약인가. 결국 박정희 정권에 협력하여 국민과 국가가 어찌 되건 말건 자신만의 편안한 정치 행보를 보인 것이다. 유신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인권은 무너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며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들끓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 이철승의 당총재 공약이 유신정권의 허울좋은 개혁에 동참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내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이철승에게 박정희의 호위무사 차지철 경호실장이 신민당 전당대회의 직접 실무를 맡아서 친 박정희 노선을 내세운 이철승 국회의원을 지원했다. 신민당 내에서 세력이 밀리던 이철승은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판을 뒤엎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측근들을 시켜서 당시 서울에서 한참 뜨고 있던 26세의 조직폭력배 김태촌을 포섭했다. 당시 고향에서 자신의 조직원들을 데리고 상경했던 김태촌은 서울에 먼저 진출해 있던 조양은과 무자비한 세력싸움을 벌이면서 조폭 세계에서 한참 명성을 얻고 있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이철승 의원에게 ‘사람만 죽이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뒤탈이 없도록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김태촌은 자신의 조직원들과 고등학교 불량학생들까지 300여명을 전당대회 5일 전에 서울로 급하게 불러올렸다. 이들은 서울 종로 일대의 여관에 분산 투숙했으며 이들이 먹고 자고 노는 모든 비용은 전부 이철승 의원이 대주었다. 사실은 그 돈의 출처가 박정희 정권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김태촌은 이철승으로부터 다음의 세 가지를 지시받았다. 첫째, 당의 직인을 탈취할 것. 둘째, 직인 탈취에 실패하면 대의원 명부를 불태워서 대의원을 다시 선출하게 만들 것. 셋째, 당직자들을 인질로 잡고 5월 25일까지 농성해서 전당대회를 무산시킬 것 등이었다. 당원모집이 쉽지 않았던 시기, 당총재를 당원투표가 아닌 대의원투표를 통해 선출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이철승은 명백하게 당 내 세력구도에서 김영삼에게 한참 밀리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당 대의원들이 모두 투표하면 패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깡패들을 동원해서 김영삼계 대의원들을 못 들어오게 막고 자기 지지자들만 모아서 전당대회를 열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면 당연히 김영삼도 따로 전당대회를 열 텐데 이럴 경우 선관위와 법원은 당의 직인을 가진 쪽을 합법 전당대회로 인정해 주게 된다. 따라서 이철승은 1단계로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당의 직인부터 탈취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경찰의 철저한 비호아래 이루어졌으며 정치깡패 300여명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이철승 또한 경찰조사 마저 받지 않은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이철승은 1988년 13대 국회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를 지내기도 했으며, 그의 딸인 이양희 씨는 현재, 국민의힘 윤리위원장을 맡고 있다. 민주당 계열 정당 수박의 원조격인 이철승은 7선의 국회의원을 지낸바 있으며, 박정희 시절 국회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당시 이철승의 별명은 ‘사쿠라’ 였다. 진보정치인을 자칭하면서 실제로는 정권의 실력자들과 내통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노리는 자들을 과거에는 ‘사쿠라’라고 칭했으며, 요즘에는 수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일본의 국화 벚꽃을 의미하기도 하며, 특히 이런 類의 정치인들이 일본인들처럼 약삭빠르고 비열하다고 하여 사쿠라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다.
위기의 대한민국, 비상상황에 맞서 이재명 대표가 단식을 시작한 지 9월 18일 현재, 19일 째를 맞고 있다. 상대편의 스피커 중 한 사람인 홍준표 대구시장마저 단식 중단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상황이다. 단순한 건강의 우려 뿐만아니라 죽음의 상황까지 도래할 수 있다는 위험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투쟁의 도구가 마땅치 않을 때 선택하는 극한의 투쟁방식이 바로 단식투쟁이다. 목숨을 건 투쟁방식인 것이다. 국민들에게는 이재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의 상황인 것이다. 이재명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단식에 동조하는 원외지역위원장들의 동조단식도 눈에 띈다. 더민주전국혁신회의와 민주당청년위원회도 동조단식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당의 전혜숙 의원은 출판기념회를 열었고, 이 출판기념회에는 이낙연 전 대표를 비롯하여 김영주 국회부의장 박광온 원내대표 등 소위 이낙연계 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총동원 되었다.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출판기념회 시기를 비판하는 것이다. 국민들은 매일 같이 전국의 광장에 모여 오염수 방류와 윤석열 탄핵을 외치며 집회와 시위를 이어가고 있으며 국가의 위기에 분노의 물결로 휩쌓여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는 것은 대단히 그릇된 행보이다.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하는 길이 꼭 단식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국민들의 저항의식을 끌어 모으는 집회와 시위도 있을 것이며, 유튜브 등의 방송에 출연하여 윤석열 정부의 행위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 이낙연의 반개혁적 행보가 하루 이틀된 사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침묵하고 있는 이낙연이 과연 진정으로 국가와 당을 생각하는 민주당의 거물급 정치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의심스럽다. 지난 8월 이낙연은 자신의 입으로 민주당의 도덕성회복이 우선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의 패악질에 맞서 싸우는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고, 또한 윤석열 정부와 그 일가의 본부장 비리에는 침묵한 채 민주당의 도덕성 운운하는 것이 정상적인 정치인의 발언인가. 이는 마치 70년대의 이철승을 연상케하는 발언인 셈이다. 이낙연은 지금 위기의 국가를 구하는 길에 동참하기 바란다. 자신이 과거 사쿠라의 대명사 이철승같은 정치인과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길 바란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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