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명언을 남긴 파스칼은 근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철학자, 심리학자였다. 그는 유고집 [팡세]에서 ‘사람들이 다수에 복종하는 이유는 더 많은 논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에 덧붙여 「힘이 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라는 말로 힘과 정의의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했다. 다만 파스칼조차도 진실의 힘과 정의의 힘을 대하는 자세에서, 그 관점의 차이를 이해시키지 못한 듯하다. 도대체 진실은 어떻게 거짓으로 왜곡되며 정의는 왜 이토록 답답한 것일까.
한국의 정치인 중에서 ‘나는 정의롭지 않다’ 혹은 ‘정의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다’라고 주장한 예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의를 위해 정치를 하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정의의 전사’로 자신들을 내세운다. 그런 정치인들이 같은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주장을 하며 서로 자신들이 정의라고 부르짖는 것은 너무 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비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는 순간까지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구현될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이 정치인의 자격증인 것처럼 여겨진다.
어디 그뿐인가. 비리를 고발한다며 내부고발자를 자처했던 사람은 정작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내부고발자 행세를 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고,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에는 결국 대통령의 은혜를 입어 사면되었으며, 심지어 자신 때문에 공석이 된 구청장의 자리를 다시 도전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자신 때문에 발생하게 된 선거비용 40억원을 애교로 봐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앞으로 1천 억을 벌어 올테니 40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일 테지만, 강서구청이 기업도 아니고 후보자가 당선자가 된들 기업인이 되는 것도 아닐 진대, 이토록 시민들을 우롱하는 발언을 뻔뻔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일까.
2019년 11월 발표된 한국사회학회의 조사 결과에서 71.3%의 응답자가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물론 빈부 격차가 기회의 불공정 같은 원인을 제공한 탓도 크지만, 불공정한 사회구조 역시 정치의 책임임에는 명확한 사실이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해소하겠다고 약속한 주제가 불공정 아닌가. 무엇보다 정치인 스스로가 자신과 관련한 불공정, 특혜 시비에 휘말리고, 이를 서로 공격해온 것이 대한민국을 ‘정의와 공정의 전쟁터’로 만든 주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의와 공정 문제에 봉착한 정치인이 자기편을 동원하고 선동해 개인 문제를 ‘진영 싸움’으로 전환시키는 현상이다.
전두환과 노태우라는 두 쿠데타 주범이자 내란음모 살인 및 권력형 뇌물 수수, 국가재산 착복 사범의 서로 다른 행보가 분수령이었던 듯하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재판 결과 부과된 추징금을 대부분 납부한 뒤 속죄의 시간을 보내고 사망한 노태우는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도 없다. 하지만 뻔뻔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법원의 판결마저 무시하며 재산도 숨기고 아직 1천 억원 가까운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고 사망한 전두환은 자신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포장하고 ‘종북 좌파의 음모설’을 퍼트리면서 ‘진영 싸움’을 앞장섰던 이력이 있다.
이 두 사람을 보면서 많은 보수 정치인은 전두환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노태우처럼 ‘순진하게’ 속죄하면 누구도 인정하거나 고마워하지 않으며, 명예회복이나 정치적 영향력도 전혀 생기지 않는 반면, 전두환처럼 끝까지 음모론을 주장하며 ‘진영 싸움’으로 프레임을 바꾸면 일부라도 지지와 추종이 뒤따르고 이익과 영향력이 생긴다는 ‘사회적 학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직인 이명박, 박근혜와 그 추종자들이 벌이는 ‘투쟁’이 가까운 예다. 여기에 윤석열은 교묘히 그 추종자들의 지지를 얻으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우리 정치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은, 정치인 개인에 대한 의혹이 ‘진영 싸움’으로 전환되면 거의 자동적으로 동료 정치인이나 우호적인 지식인, 지지자들이 지원 사격에 나서는 것이다. 언론 등을 통한 비판과 여론 형성 과정, 행정적 조사, 사법적 재판 등 공적인 ‘절차’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하거나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다. 한국 정치가 적대적인 양 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탓도 있지만 권력에 의해 왜곡된 행정과 사법 절차 운용, 정론직필을 포기하고 왜곡과 선동에 나섰던 언론의 비뚤어진 모습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박근혜의 탄핵을 목도했던 저들은 쉽게 말해서 ‘가만히 있으면 당한다’, ‘우리만 순진하게 당할 순 없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으면서 결국 정권 탈환에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정치인들은 인정하고 책임지는 것보다 억울함을 호소한다. ‘날 도와주지 않으면 다음엔 당신이 당할 수 있다’고 주장해 진영의 막강한 도움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잘못이 있는 경우엔 책임을 모면할 동아줄, 잘못이 없거나 경미한 경우에도 혹시 모를 억울함을 미연에 방지할 안전망이 되기에 외면하기 힘든 유혹이다. 정치권의 이러한 인식과 태도는 그대로 시민과 사회 전반에 확산된다. 어차피 공정하지 않은 절차, 목소리 큰 사람이나 돈과 배경을 이용하는 자에게 유리한 사회라는 인식이 퍼지게 된다. 유전무죄, 전관예우, 청탁 문화, 줄서기, 제 식구 감싸기 등 고질적인 한국 사회 병폐의 뿌리가 정치권인 것이다.
‘공정’이라는 화두를 장악해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공정’이라는 이 시대의 화두를 짊어지고 나갈 적임자로까지는 인정받지 못하는 보수 진영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진보 진영도 우리처럼 타락했고 불공정해’라고 소리 지르는 것밖에는 없다. ‘보수 강세’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겨우 형평을 잡아가고 박근혜 탄핵을 통해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섰을 때 방심했던 문제들을 등한시 한 후, 정권은 다시 넘어가고 말았다. 많은 시민들의 촛불, 블랙리스트라는 고통과 아픔의 대가로 얻은 신뢰 자산을 지키지 못한 댓가로 회복하지 못할 상처와 후회로 남게 된 것이 바로 정권을 넘겨준 일이다.
진실이 가려지는 이유는 진실과 정의가 반드시 같은 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본인이 억울하다 주장한다고 해서,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지지하고 감싸며 ‘진영 방패’를 가동한다면 그 정치인들은 게으르거나 무능하다고 비판받아야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지지자들은 자기 진영의 정치 지도자나 주요 정치인 혹은 ‘스피커’ 역할을 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부당한 정치적 공격’ 혹은 ‘음모’라고 주장하면 이를 믿고 행동에 나선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당연한 정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당위성을 고민해 봐야 한다. 특히, 부정부패비리의 정치인도 진실은 가려진채 정의감에 호소하는 진영논리에 맞춰 옹호해주는 모습이 반복되면서 민주당이 위선과 무능의 정당으로 지지자들에게 각인되고 있다는 현실인식도 중요하다.
진실과 정의는 어느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실’과 ‘게으른 정의’에서 탈피할 때 비로소 한국 정치가 정상화될 것이다. ‘무능한 진실’에서 벗어나 ‘게으른 정의’를 극복해야 하는 한국 정치의 큰 과제를 시행하기 위해 시민들의 촛불정신이 더욱 간절할 때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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