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은 박종철 열사의 고문 사망으로 문을 열었다. 언론 검열과 통제가 극심했던 상황에서 조그마한 가십기사처럼 물고문 사건이 소개되었고 이후 그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군사정권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박종철 열사의 사망사건을 덮기 위해 수지킴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항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경찰은 애초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사망원인을 발표했다. 그러나 민심에 쫓겨 정권은 결국 박종철 열사의 부검을 실시했다. 그 결과 시신은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세를 몰아 대학생들을 비롯한 시민사회는 민주헌법 쟁취라는 개헌 투쟁으로 정권을 압박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개헌 논의는 곧 있을 1988 서울 올림픽 끝나고 하자’는 말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묵살했고, 국민들의 민심은 격앙되었다. 이에 호헌철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개헌투쟁은 더욱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호헌철폐는 당시 전두환의 5공화국 헌법을 지키고 고수하겠다는 정권의 주장에 반발하며 당장 민주헌법으로 개헌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이 축소 조작되었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경찰과 정부의 도덕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여론은 폭발했고, 야당과 재야운동권은 고문 살인 은폐 조작을 규탄하는 대규모 대회를 열었다. 5월 27일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가 결성되어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주 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본은 6월 10일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그리고 6월 9일. 전국 각 대학 학생들은 10일 집회 하루 전, 각 대학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열게 된다. 연세대도 예외가 아니어서 천여 명이 노천극장에 모여 사전 집회를 진행했다. 학생들은 ‘전두환-노태우 화형식’을 끝낸 후 교문 앞으로 진출하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교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들은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본래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사격한 최루탄이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의 후두부를 직격한 것이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사진을 본 국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민심은 끓어올랐고 여론은 격화되었다. 정권은 드디어 ‘6.29 선언’을 통해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통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국민들의 민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87년의 민중항쟁은 개헌으로 만족해야 했던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민주진영의 분열로 군사독재는 연장되었다. 이후 핑퐁처럼 이어지던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정권교체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총칼로 국민들을 억압하지 못하자 언론을 장악하고 검찰을 동원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휘두르며 새로운 방식의 검찰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서는 매주 토요일마다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부정부패와 패악질에 맞서 정권퇴진 운동으로 시작된 집회는 어느덧 윤석열 탄핵집회로 발전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취약하고 국가의 구조는 허술하기만 하다. 윤석열의 정적으로 거론되는 이들은 끝없이 검찰의 횡포에 시달리며,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언론은 늘 언론 탄압이라는 정권의 공격에 맞서고 있다. 이제는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1987년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며 독재타도의 선봉에 나서며 국민 모두가 목청을 높여야 한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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