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슬'로 한 시대를 위로했던 김민기 '이슬'처럼 살다 떠나다고인과 인연이 있던 사람도 없던 사람도 이념의 좌우를 떠나 추모 물결
민중가요 ‘아침이슬’과 ‘상록수’를 만들어 엄혹한 시대의 진실을 노래했고, 낮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한 시대의 가객 김민기 선생이 22일 7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념과 상관 없이 모든이들이 한 목소리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1971년도에 발표한 ‘아침이슬’이 민주화 시위에서 널리 불리자 유신 정권은 김 선생의 모든 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하고 그의 활동을 탄압했다. 1987년 7월, 이한열 열사 추모제가 열린 시청 앞에서 백 만 인파가 아침이슬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선생은 ‘이제 아침이슬은 나의 노래가 아니라 당신들의 노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페이스북에서 "아침이슬의 노랫말은 이 엄혹한 현실 속에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우리가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일깨우고 있다"라며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에 시련 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고인이 가는 길을 슬퍼하는 비가 내립니다. 부디 편안히 잠들기를"이라고 추모했다.
조국혁신당 조국 신임 대표는 "명예와 부는 김민기 선생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앞것’이 아니라 ‘뒷것’을 택했다"라며 "한국 예술계에서 ‘뒷것’ 김민기 선생에게 빚지지 않은 ‘앞것’이 있는지요"라고 애도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상록수보다 푸르고, 아침이슬보다 맑은’ 김민기 님은 멀리 떠나셨지만,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라고 슬픔을 나눴다.
윤석열 대통령도 페이스북에서 "역사는 선생님을 예술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지닌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할 것입니다"이라고 적었다.
류근 시인은 "갖은 고난을 이기고 상류에 이르러 그 육신마저 마침내 내어주고 스러지는 연어처럼, 온 생애가 저절로 타인과 나누고 베푸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그곳에서는 부디 평화로우시길 빕니다"라고 애도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폭압에도 선생의 예술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노동 현장과 야학을 누비며 ‘상록수’와 노래극 ‘공장의 불빛’ 등을 만들며 노동자, 빈민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4천 회 공연 신화를 썼던 극단 ‘학전’을 만들어 수많은 신인 연극배우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게 했다. 다음은 선생이 고3 시절 야영 중 사고로 목숨을 잃은 친구를 추모하는 '친구'의 노랫말과 공장 노동자의 애환을 그린 노래굿 '공장의 불빛' 가사 일부로 당시 열악한 노동자 인권과 노동환경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내용으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침이슬, 상록수 등과 함께 민중가요로 널리 회자했다.
<친구>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다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른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위에 어른거리고 저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하나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눈앞에 떠오른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위에 어른거리고 저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공장의 불빛>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 온데 간데도 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남녀모두 이대로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여기는 또 다른 고향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두어라 가자 몹쓸 세상 설운 거리여 두어라 가자 언땅에 움 터 모질게 돋아 봄은 아직도 아련하게 멀은데 객지에 나와 하 세월도 길어 몸은 병들고 갈갈이 찢겼네 고향집 사립문 늙은 오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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